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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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은 1993년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다. 명불허전의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게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엄청난 흡인력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살짝 늘어지는 전반부 탓에 백야행이나 환야 보다는 부족한 몰입감을 선사하지만 간결한 문장과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신의 장난처럼 이어진 유사쿠, 아키히코, 미사코 세 남녀를 중심으로 엮인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가듯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적한 시골마을 아이들의 놀이터로 허락된 벽돌 병원에는 천사 같은 누나 시나에가 있다. 평범한 어른들과 다른 시나에가 왜 병원에 있는지 아이들은 아무도 몰랐지만, 그녀의 천사 같은 웃음과 간식은 그녀의 평범하지 않음을 잊어버리고 아이들이 그녀를 따르게 한다. 유사쿠 역시 벽돌 병원의 시나에 누나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가을 시나에게 죽었다. 유사쿠의 머릿속에 각인된 죽음이었지만 죽음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유사쿠는 운명처럼 다시금 시나에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하고 미사코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실이 아닐까. 그 실이 아직 존재하고 있어서 지금도 내 인생을 조종하는 게 아닐까..." (p.36)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전기기기 제조업체 UR 전산의 대표 우류 나오아키의 임종을 시작으로 그들의 운명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한다. 나오아키는 대부분의 유산을 가업을 잇는 대신 도와대학의 뇌의학을 전공한 장남 아키히코에게 남긴다. 재혼한 젊은 부인도 어린 남매도 돌보지 않은 채 말이다. 가업을 마다하고 뇌의학을 전공한 의사가 된 장남 그리고 그에게 모든 유산을 남겨준 나오아키 이들은 무슨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나오아키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아키히코는 물욕에 눈이 먼 친척들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품을 나눠주기로 하고, 금고안 깊숙이 보관되어 있는 오래된 파일만을 남겨두기로 한다. UR 전산의 새로운 대표 마사키오는 나오아키의 와병 중 비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오아키의 미망인 아야코를 속이고 아키히코가 남겨둔 금고안에 보관된 의문의 파일을 가져가고, 이어서 벌어진 석궁 살인! 아키히코를 운명의 숙적으로 여기는 유사쿠는 모든 추리의 화살을 아키히코에게 맞춰간다.

각기 다른 매력의 뛰어난 능력을 지닌 아키히코와 유사쿠 두 사람의 운명 같은 경쟁을 지켜보는 재미가 추리소설 속의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기업의 무분별한 욕심에 의해 자행된 생체실험의 비극적 결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적 결말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를 내보이는 아키히코의 우직함이 돋보인다. 그러나, 그의 우직함은 자칫 베일에 싸인 또 하나의 범죄를 연상하게 하지만, 내보이지 못하는 상처에 둘러싸인 또 다른 피해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나 이외의 사람이 내 인생을 정하는 건 딱 질색이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야." (p.221)

우류 가의 많은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다 싶을 정도의 욕심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많은 악행 속에서 버티듯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아키히코가 이상해 보일 정도로 그들의 욕심은 자연스럽다. 세사람의 운명의 실타래를 숙명이라는 묵직한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쩌면 운명을 가장한 숙명보다는 과학의 발전, 발견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기업의 폭력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글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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