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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사이드 클럽 ㅣ 스토리콜렉터 83
레이철 헹 지음, 김은영 옮김 / 북로드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죽음을 강탈당하면 삶도 강탈당하게 됩니다. (중략) 우리는 선택권을 빼앗겼습니다." (p.14)
넓은 어깨의 각이 딱 떨어지게 재단된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한 남자가 화염에 휩싸여 죽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금의 삶은 죽음을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선택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붉은 화염에 휩싸여 죽어간다. 스스로 삶을 저버린 것이다.
인구감소와 의료기술의 발달로 선택된 유전자를 가진 일부의 사람들이 평균 수명 300살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 그들은 곧 새로운 변화를 맞아 영생을 누릴 수 있기를 꿈꾸고 있다. 축복받은 유전자와 관리 덕분에 탄력적인 피부와 건강을 유지하며 도시의 삶을 누리고 있는 라이퍼들 그리고 그들과 달리 늘어가는 주름과 처진 뱃살과 함께 어두운 뒷골목의 삶을 살아가는 비라이퍼들의 이야기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실리콘 피부와 기계음이 들리는 심장을 품고 코르티솔 수치가 두려워 스테이크 한 조각 조차 허락하지 않는 무미건조한 라이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비슷한 체격과 비슷한 나이의 외양을 하고 있는 인형 같은 삶이다.
레아 또한 성공적인 라이퍼의 삶을 영위하며, 누구보다 빠른 승진과 새로운 변화 제3의 물결에 합류하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그녀 앞에 88년 만에 사라졌던 아버지 가이토가 나타나고 라이퍼 레아의 윤택한 삶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성공적인 라이퍼를 자부하던 그녀가 감시 대상으로 분류되고, 영생으로 이어지는 제3의 물결에 합류할 수 없게 된다.
라이퍼의 삶을 부정하며 죽음을 선택하려는 기리노의 계획을 알게 된 레아는 성공한 라이퍼의 삶을 되찾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 기리노를 죽음의 선택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금지된 음식을 먹고, 금지된 음악을 들으며 라이퍼를 부정하는 그들 '수이사이드 클럽'을 쫓는다. 과연 레아는 수이사이드 클럽의 비밀을 찾고 다시 그들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색다른 소재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끔찍한 상상에 몸서리치게 된다.
"문득 아빠가 정말로 죽으려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도시로 돌아와서 클럽에 들어갈 때만 해도 아빠는 죽을 생각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아빠는 죽으려 하고 있었다. 이제야 아빠가 진정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았다." (p.366)
때가 되면 언젠가 세상에서의 삶을 접고,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삶이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 백 살 남짓 삶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것도 지루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영생의 삶을 누려야 한다면 그것을 과연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각자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나의 생각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지만, 장기를 바꾸고 몸 안에 흐르는 피를 바꿔가면서 영생을 누리라고 한다면 나의 대답은 No 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삶과 죽음의 무게에 대해 가볍지 않은 고민을 남기는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