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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평점 :
사람의 인생에서 기억이라는 존재의 무게가 얼마나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까. 만약 나에게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이 아닌 바로 직전의 단 10분간의 기억만 주어진다면, 10분간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나를 진정한 의미의 나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기억이 분리된 세상에서 펼쳐지는 기묘한 이야기들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세계로 나를 이끈다.
현재의 인류가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겪고 있는 디지털치매의 증상과 흡사하다. 아니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나타날 수 있는 기묘한 현실에 대한 오싹한 경고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집 전화번호에서부터 식당 전화번호까지 줄줄이 외고, 간단한 사칙연산은 암산으로 해결하고, 두꺼운 사전에서 단어를 찾던 어린 시절을 지나 지금의 나는 손안의 작은 컴퓨터, 핸드폰과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유키 리노의 엄마 마사키가 기억을 잃고 난후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기억을 잃기 시작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짧은 기억을 저장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난 후 인류는 장기 기억을 저장시킨 외부 메모리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아마도 인류에게 기억 장애가 생긴 듯합니다. 모든 기억이 10분 남짓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당신의 기억도 사라집니다. (중략)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행동하십시오." (p58)
외부 메모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은 지금과 다르지 않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펼쳐진다. 복사의 실수로 같은 기억을 가진 쌍둥이가 등장하기도 하고, 대리시험을 위해 메모리를 빌려주거나 기억을 잃은 아이에게 자신의 기억을 나눠주기도 한다. 무겁지 않은 글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세상을 풍자하고 있는 다양한 주제로 구성된 극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음과 추억을 뒤로한 채 메모리를 통해 기억을 쌓기도, 잊기도 할 수 있는 사람을 "나"로 인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문득 발전해 가는 디지털의 바닷속을 뛰쳐나와 아날로그 감성이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보다는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상상으로 두려워지는 책읽기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