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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 심은영 장편소설
심은영 지음 / 창해 / 2020년 3월
평점 :
대부분의 사건이 작가의 상상력이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 몸서리쳐진다. 마땅히 보호받아야할 아이들이 가장 안전한 공간이라 여기는 학교와 가정에서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다. 부모의 배경을 등에 업고 무자비하게 벌어지는 학교 폭력과 차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슴없이 저질러지는 권력자의 횡포 그리고 따뜻한 가정이라는 가면을 쓴채 행해지는 가정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이 있다. 언제든 숨어들어갈 수 있는 무거운 집을 짊어지고, 연약한 몸뚱아리를 숨기기 위한 딱딱한 집은 강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달팽이와 같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살기위해 이기적인 생존본능을 지닌 달팽이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끔찍하고 처절하게...
법무부 검찰국장 서용걸은 연호, 연우, 지민 세남매를 홀로 키우고 있는 모범적인 아버지다. 아니, 모범적인 가면을 쓰고 있는 파렴치한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라고는 아버지 밖에 없는 아이들을 이유없이 학대하고, 심지어 여리디 여린 딸을 범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철저하게 사회와 격리시켜 서서히 무너져가는 가정을 감추고 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내게도 연우에게도 '가족'이란 가슴 벅차거나 아릿한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명사였다. 내가 아프고 힘든 순간에는 당당하게 날 외면하고, 자신들이 필요한 순간에는 가족이길 강요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순수하게 악랄한 혈연집단을 가리키는 명사. 그게 내가 배운 가족이었다." (p.47)
뱀처럼 유연하게 여린 아이의 몸을 가로지르는 허리벨트를 첫 기억으로 갖고 있는 연호. 아버지의 폭력에서 연우를 지키기 위해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틴다. 외줄을 타듯 늘 아슬아슬한 연우와 어느날 그들앞에 나타난 지민. 끝없는 암흑이 이어지는 가정에서 연호와 연우는 지민이 고통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꾸지만, 여섯살 어린 나이에 무자비한 성폭행을 당한 지민의 사건을 시작으로 위태롭게 버텨오던 그들의 가족은 무너진다. 어쩌면 좀 더 빨리 무너졌어야 했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일찍 세상의 빛과 닿을 수 있도록 말이다.
악마같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비극은 극단적인 사건으로 점점 휘말려 들어가고, 그렇게 14년이 흐른 후 어둠속에 감춰진 연호의 가족을 부러워하던 민수와 옳은 교사를 꿈꾸던 연우가 다시 만나는 것으로 비극은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이 교직에서 겪었던 일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텔레그램 n번방의 이야기로 연일 세상이 시끄럽다.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아이들의 성을 착취하고 노리개로 삼아 휘두르고 있다. n번방에 입장했던 많은 사람들이 성폭력을 직접 실행하지 않고, 만들어 놓은 것을 그저 관람하기만 했다는 이유로 처벌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이같은 파렴치한 범죄에 대해 다시 한번 관대한 처분을 희망하고 있다. 파렴치한 범죄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사회 또한 n번방 그들과 같은 공범이다. 이번 사건이 제대로된 처분을 받아 다시는 이런 범죄자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예상을 뒤집는 충격적인 반전과 슬픈 결말이 가슴 아픈 소설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성적이면 모든 잘못이 용서되는 이상한 학교를 당연하게 만들어서, 권력이라는 힘앞에 정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만들어서, 파렴치한 어른들의 가면을 벗길 수 없는 무기력함 때문에 아이들에게 다시한번 부끄럽고 미안해진다.
"난 달팽이가 좋아. 낯선 이가 나타나면 집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것도, 언제든 숨기 위해 그 무거운 집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너무나 연약해서 다치기 쉬운 그 몸도, 상처받을까 봐 숨는 건데 모두들 딱딱한 짐만 보고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언니랑 닮았잖아. 그래서 달팽이가 좋아." (p.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