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러스먼트 게임
이노우에 유미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2월
평점 :
모든걸 접어두고 하얀거탑의 각본가 이노우에 유미코 장편소설이라는 소개글에 조금의 고민도 없이 선택한 책이다. 2018년 9월 TV 도쿄에서 인기 드라마로도 방영되기 했다니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 소설이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직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공감가는 사례와 함께 풀어나가고 있는 글이 흥미롭다. 막힘없이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는 책이었다. 어느새 뒤바뀐 상하관계, 약점을 잡기 위한 뒷조사 그리고 다양한 직장내 괴롭힘이 뒤섞여 있다.
주요 소재인 해러스먼트 괴롭힘, 학대를 뜻하는 일본어다. 단순한 괴롭힘, 학대를 의미하기 보다는 학교 내 괴롭힘 이지메처럼 주로 직장 내 괴롭힘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작년 7월부터 직장 내 괴롭힘 방지를 위한 근로기준법이 개정 공포되었을 만큼 직장 내 괴롭힘은 가볍지 않은 화두다.
은밀하게 벌어지는 직장 내 괴롭힘을 해결하기 위한 사장 직속의 컴플라이언스실이 소설속의 주요 공간이다. 7년전 부하 직원의 내부 고발로 좌천되어 지방 소도시에서 마루오 지점장으로 일하고 있는 아키쓰. 평소처럼 새벽 낚시를 나갔다가 묵직한 중량의 참돔을 낚을 뻔 해지만 도리어 참돔의 힘에 이끌러 바다로 끌려들어간 개운치 않은 아침이었다. 아침의 바다 입수가 복선이었는지 새벽 낚시를 즐기고 출근한 그에게 본사 인사부로부터 오늘 당장 도쿄 본사 컴플라이언스실 실장으로 출근하라가 걸려온다.
"왜 하필 내가? 수많은 아수라장을 거쳐 왔다고 자부하는 아키스였지만 그 이유는 도저히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p.14)
마루오 슈퍼의 인기상품 '완전 안심' 크림빵에 1엔짜리 동전이 들어있었다는 소비자의 항의와 함께 절묘한 시기에 문제의 크림빵이 판매된 렌마점으로 걸려온 '파워하라를 중단하지 않으면 마루오 슈퍼 모든 지점에 위해를 가하겠다'는 의문의 전화가 이어지면서 비어있는 컴플라이언스실의 최강의 상사로 아키쓰가 소환된 것이다.
마루오 홀딩스가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원투수로 소환되기는 했지만 아키쓰는 해러스먼트에 대해서는 초보에 가깝다. 하지만, 아키쓰를 보좌할 해러스먼트계의 똘똘한 선배 마코토가 있다. 관록의 아키쓰와 이론으로 무장한 마코토의 화끈한 콤비플레이로 이어지는 해러스먼트 사건들을 시종일관 통괘하게 해결한다.
상하관계 권력에서 나오는 파워하라에서 부터 성차별적인 젠더하라, 나이때문에 불거지는 에이지하라 그리고 하극상으로 치닫는 보이지 않는 폭력 모라하라까지... 셀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괴롭힘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해러스먼트들은 안타깝게도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퇴직의 편리한 명분이 되기도 한다. 사례 하나하나가 등장할 때마다 나의 직장생활을 뒤돌아 보게 된다. 혹시나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었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유없이 상처받았던 적은 없었는지 하면서 말이다.
"이럴 때 파워하라나 성희롱은 편리해. 그만두게 만들 대의명분이 되니까. 해러스먼트도 참 각양각색이야." (p.127)
마루오 홀딩스의 명운이 걸려있던 마지막 사건 후 아키쓰는 임원 제의를 받지만 하고 싶은 말은 다하고 살고 싶다며 지체 없이 거졀하는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아키쓰가 임원을 거절하고 달랑 부하직원 한명과 일해야 하는 컴플라이언스실의 실장으로 남은건 안전하지만 시시한 일일까? 아니면 위험하지만 재미있는 일일까? 아키스의 선택의 이유가 궁금해진다.
"재미없어? 그럼 그만둬. 안전하지만 시시한 일이거나 위험하지만 재미있는 일, 둘 중에 하나를 해야지. 위험하면서 재미도 없는 일을 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p.288)
오피스 소설답게 직장인들이 무한 공감을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에피소드들로 꽉 채워져 있다. 능글맞은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부하직원에게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아키쓰 같은 상사와 근무했으면 하는 바람과 또 한편으로는 나도 아키쓰 같은 상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함께하면서 책을 덮는다.
"컴플라이언스실 실장인 아키쓰입니다. 편히 생각하시고 말씀해 주세요. 당신이 조금이라도 일하기 쉬운 환경이 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p.350)
"그러고 보니 새벽 시간대의 동틀 녘과 마찬가지로 해가 기울기 직전의 시간대에도 물고기가 많이 잡힌 다고 한다. 일몰까지 한 시간이 관건이었다." (p.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