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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에 미쳐서
아사이 마카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제목과 표지 그림만 보면 아기자기한 로맨스가 펼쳐질 것 같은 분위기지만, 꽁냥꽁냥 아기자기한 로맨스보다 서로를 인정하며 끌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글이었다. 야채와 함께 애절한 로맨스를 기대하는건 무리였겠지만, '야채애호독점타파 로맨스'에서 야채만 애호하고 독점을 타파하는 진정 야채와 사랑에 빠진 야채와 상인간의 로맨스였다. 약간의 투닥거림으로 한쌍의 연인이 탄생할 것으로 예견되기는 하였으나, 꽁냥꽁냥한 로맨스를 기대했던 나는 살짝 아쉬웠다. 하지만 천하의 주방 오사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답게 화려한 음식을 상상하기에 충분했고 에도시대의 상인과 농부의 모습을 흥미롭게 느낄 수 있었다. 부족한 로맨스를 아쉬워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한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각 챕터의 제목들이 귀염귀염한 간사이 사투리로 되어 있다. 단어의 느낌과 의미를 연결하기 어려웠던 덕분에 챕터를 시작하기전 제목의 의미를 읽어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지사토는 얼마전 남편을 잃은 청상으로 형편이 여의치 않아 고향 에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님편의 임지였던 오사카에 남아 습자소에서 일을 하며 근근히 살아간다. 일하던 습자소에서 부당한 해고를 당한 어느날 운명처럼 숙소에 도둑이 들어 노숙자 신세를 면하기 어려운 곤궁에 처한다.
이때, 덴마 청과물시장의 가와치야 상점의 엉뚱한 큰아들 세이타로와 마주치게 되고 그의 소개로 가와치야의 새침한 안방마님 시노의 하녀가 된다.
상점의 경영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스카탄(얼간이, 바보, 허당) 세이타로지만 사실은 원리원칙대로 야채를 너무나 사랑하는 진정한 상인이다. 건실한 노동으로 생산한 질 좋은 야채를 제값에 사들이고, 꼭 필요한 이문만을 남기고 주민들에게 좋은 야채를 팔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찬 허당기 충만한 가와치야의 차기 당주다.
"큰도련님이 오시면 가게도 안채도 왠지 밝은 햇살이 쫙 비춰 드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고 재미있거든. 조금 언짢은 일이 있어서 마음이 착잡해도 큰도련님만 오시면 그게 대수냐 싶은 기분이 들어." (p.57)
스카탄 세이타로를 우습게 보지만 맛을 보는 야채마다 산지와 특징을 척척 알아맞출 정도의 해박한 지식과 상단이 독점하는 야채시장의 앞날을 걱정하는 그에게 어느샌가 푹 빠져버린 당찬 에도여자 지사토. 결정적인 순간에 세이타로를 돕는 지혜를 뿜어내지만 자신의 감정에 무딘 세리타로의 천상베필이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오사카 가와치야 상단의 평범한듯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더불어 상단 종업원들의 성장하는 모습과 그들의 일을 사랑하는 모습은 당주와 가신들이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꼼꼼히 보여준다.
"본명에서 첫 번째 글자를 따고 마쓰를 붙여. 오 년쯤 일하자 기치 자를 받아 조키치가 되고, 십 년이 지나자 데다이로 승진하면서 조시치, 이십 년이 지나 지배인이 되면서 조스케, 삼십 년을 근무해서 조베에라는 이름을 받았어. 그러면 분점을 열거나 목돈을 받아 별가를 세워 한 집안의 당주가 되는 거야." (p.95)
농민과 상단 그리고 주민이 서로 통하는 풍경,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세이타로와 그를 지켜보는 지사토의 잔잔한 로맨스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