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생 우리 엄마 현자씨
키만소리 지음 / 책들의정원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환갑이 넘도록 살아보니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인생이 모자르더라. 살면서 깨달으면 그땐 이미 너무 늦어. 그러니 지금이라도 나로 살아봐. 살아보니 그게 맞더라. 별 일 없는 하루도 내가 따로 살면 그게 맞아."

나도 가끔 우리 엄마를 '정여사'하고 부른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건 아니다. 장난을 가장해서 엄마를 객관화 시켜서 부른다고나 할까. 장난처럼 엄마를 정여사라고 부르때면 의지하고 매달리던 엄마보다는 친구같은 느낌이 좀 더 든다거나, 딸이 아니라 객관화된 성인으로 뼈있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살짝 과한 텐션을 누르거나, 장난을 치고 싶을때면 엄마를 놀리듯 정여사로 부르곤 한다.

나도 어른이 되어서 엄마가 되고 보니 '엄마'라는 위치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살아가는, 힘들고 외로운 자리인지 깨닫게 된다. 엄마는 태어날때부터 엄마였던 것처럼 자신의 인생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당연하게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딸로 살아간다. 세상은 무언의 압박과 강요로 너무나 당연하게 엄마에게 나를 버리고 살아가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 것 같은 현자씨도 모르는게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로 사는 방법이었다." (p.45)

우리 엄마는 저자의 엄마 현자씨보다 3살 많은 52년생 해옥씨다. 그 나이대의 대부분의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생활형편에도 억척스럽게 삼남매를 키워 내셨다. 당신은 변변한 옷 한벌도 사입지 않으시면서 말이다. 3남매를 다 키워놓고 이제는 조금 편해질만하니 웬수 같은 자식들이 지들 새끼들을 맡겨 놓는 바람이 또 나로 살기 어려운 할마가 되어 매인 몸이 되셨다. 우리 애들은 이미 다 컷지만 나도 한몫 했던지라 할말이 없다. 해옥씨 쏘리 :)

우리 엄마도 현자씨처럼 언제가 될런지 모르지만 여유가 생기면 컴퓨터도 배우고 춤도 배우겠다고 야심차게 계획만 세우고 계신다. 우리 해옥씨도 주민센터 왕초보 컴퓨터 얼른 등록 시켜드려야 할텐데, 울 엄마 컴퓨터 배우러 가시는 순간 조카가 갈곳을 잃어버리게 되는지라 안타깝지만 지금은 왕초보 컴퓨터 등록이 어렵다.

엄마는 자식들에 이어 손자들에게 묶여 있으면서도 행여나 딸들이 당신처럼 포기하는게 많아질까봐 걱정이 많으시다. 오늘도 푸념처럼 우리 엄마는 '엄마처럼 살지말라'는 말을 딸들에게 전하신다.

"눈치 보지 말고 참지 말고 살아. 그렇게 살아도 세상 안무너지더라. 설사 세상이 무너진다고 해도 내 속이 무너지는 것보다 낫더라." (p.62)

55년생 현자씨의 일탈 아닌 일탈을 보면서 우리 엄마가 많이 안쓰러워졌다. 우리 엄마도 현자씨처럼 컴퓨터도 배우고 춤도 배우고 싶을 텐데. 그렇게 해드리지 못하는 자식이라는게 많이 미안해진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먹고 싶은 것만 먹어도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절제하는 삶을 강요당하는 엄마들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읽기였다.

"배우지 않아도 어떻게든 굴러가던 인생을 굳이 붙잡아 힘들고 바쁘게 사는 엄마의 고생을 응원하고 싶다. (중략) 나를 위해, 남겨진 많은 사람들을 위해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더 고생해줘. 엄마, 파이팅!" (p.194)

귀여운 캐릭터의 현자씨가 힘들지만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면서 하루하루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책읽기의 흥미를 더해준다. 더불어 책의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는 엄마의 서툰 e-메일은 엄마가 배우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52년생 우리 엄마 해옥씨가 엄마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새로운 일탈을 할 수 있도록 부추기고 싶어진다. 그리고 나 또한 더 늦기 전에 엄마, 아내, 딸로만 살지 말고 나로 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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