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레지스탕스 - 야만의 시대와 맞선 근대 지식인의 비밀결사와 결전
조한성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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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만큼 투쟁의 대상이 명확한 시대가 있었을까?  식민지라는 현실이 외부에서 침입해 온 적대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의미라면, 독재라는 내부의 적을 상대해야 했던 한국의 근대사에 비해 무엇을 해야할까라는판단은 비교적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면역학적 사회, 어떤 형태로든 상대해야 할 대상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회로 보자면 일제 강점기만큼 그 정의가 확실하게 다가오는 시대도 없을 것이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친일을 일삼은 조선인이라는 내부의 적, 조선인을 돕고 이해하려는 일본인이라는 적안의 양심 등등의 복잡하고 다양한 면면을 볼 수 있겠지만, 일단 이런 세부적인 면면은 접어두고 서술한다.


  면역적으로 반응을 일으켜야 할 대상이 매우 분명한 시대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제목은 왠지 생소하거나 새로운 느낌을 준다.  레지스탕스라는 단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나찌에 대항하던 유럽인들의 이야기에서 레지스탕스라는 단어는 익숙하게 다가오건만, 왜 우리의 식민투쟁사에서는 이리 익숙치 않은 단어가 되어버렸는가..  친일 기회주의자들이 지금시대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이 단어가 어색하다는 것은 적어도 나는 일제강점기의 투쟁사를 잘 모르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일이 아닐까?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 산'의 일대기는 투쟁의 처절함을 가감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이 시대의 우리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들이 그 책에는 수없이 맨모습으로 묘사된다.  추적을 피해 혹한의 겨울 갈대늪에서 며칠을 버텨야 하고, 굶기를 밥먹듯 하며, 결핵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만 했던 처절함에서부터 시작하여, 젊은 나이에 결국 병으로 숨져가며 말하는 마지막 소원은 연애한 번 못해 본 한 때문에 여인네와의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동지의 죽음 앞에서 살아남은 동지가 자신의 아내를 데려다가 입맞춤을 시켜주던, 인간의 기본적 욕구조차도 사치인 사람들의 처절한 삶의 기록에 비하면, 한국의 레지스탕스 책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무척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내용도 구성도 무언가를 좀 더 친근하게 다가와 진지하게 말하려는 듯한 의지가 보인다.  일제의 현금수송마차를 감쪽같이 털어낸 사람들의 이야기, 정체절명의 포위망 안에서도 죽더라도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는 의지는 죽는 순간까지 권총 방아쇠를 당기고 있더라는 열사의 모습, 임시정부의 실체, 그리고 그 안에서 보여준 이승만의 기회주의적인 모습과 그의 실체까지, 친근하고 쉬우면서도 구체적인 설명이 책장을 쉽게 넘기게끔 한다.  동시에 들었던 생각은 왜 우리는 이제껏 이런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접할 수 없었던가, 이런 내용들은 우리는 왜 직접 찾아내어 배워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아쉬움이었다.


  아쉬움은 말미에 더 깊어진다.  우리에게 해방은 어떤 모습인가.  이 책에서는 미완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해방을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저항을 이야기함에 있어 굳이 깊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지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 말아버린 듯한 말미의 내용은 무척 아쉬움과 궁금증을 자아낸다.  내가 공부한 해방의 모습은 해방이 아닌, 식민상태에서 지배세력의 교체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 과정이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고 미군이 인천을 통해 들어왔을 때, 그들은 중무장 상태의 행군이었고 그들을 맞이하러 태극기를 들고 나간 조선인들 중, 감격에 겨워 행군대열 앞으로 뛰쳐나가던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 내가 공부했던 해방의 모습이다.  해방이후 조선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거쳐 지금까지 우리가 인식해 온 것은 자유당으로부터 시작된 독재와 친일잔재의 연연이었지만, 이를 거슬러 해방의 과정과 형식을 살펴보면 과연 우리는 정말 해방이 되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저자에게 우리의 해방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는가를 묻고 싶다.  내가 알고 있는 해방의 이해는 편향된 공부때문에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알아야 할 해방의 모습의 일부인지, 그리고 내가 모르는 그리고 이해해야 하는 이면이 존재하는 것인지, 이 책을 쓴 저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책의 내용을 보아서는 무척 재밌고 쉽게 말해 줄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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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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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무언가 이야기거리를 만든다.  단순히 경험에 대한 이야기의 확장이 될 수도 있지만, 거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지식을 더한다면 이야기는 깊고 넓게 증폭된다.  증폭된 이야기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재미 이상의 생각을 만들어 준다.  잔잔한 공감이 되는 이야기라면 아마 감동까지도 선사할 것이다.  나의 경험에 나의 생각을 더하여 타인에게 들려준다는 일은 그런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이 말하는 경험은 제목처럼 철학자가 늑대와 함께 한 11년간의 동거를 말한다.  우연히 늑대를 키우게 된 철학자의 경험이 철학자 자신의 생각과 만나 깊고 넓게 증폭된 인문학적 경험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덩치가 큰 개를 원했던 철학자가 늑대를 만나 함께 생활한다는 것 자체로도 독특하긴 하지만, 독특함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운동감각이 있고 섬세하고 철학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저자가 풀어놓는 브레닌의 행동, 심리, 반응 등에 대한 관찰과 묘사는 개와는 분명 다른 늑대라는 종에 대해 충분한 비교이해가 될 정도이다.  저자는 늑대인 브레닌을 무척 사랑하고 아꼈음은 당연하게 책의 내용에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인간중심의 사고와 행동이 만연한 현대사회에서 브레닌을 대표하여 늑대라는 존재의 위상을 인간의 위상수준에 가깝게 올려놓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물론 늑대만이 아닌,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들의 존재에 대한 존중심을 보여준다.  책을 읽어나가는 입장에서 무척 공감하며, 그런 사고는 이미 생태론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운동이자 그런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생명있는 존재들에 대한 존중을 실천해나가고 있다고 본다.  차이는 다만, 저자는 자신의 철학적 사고를 대입하여 인간 외의 동물들에 대한 존중심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나간다는 점 뿐이다. 


  저자는 늑대만이 가진 사고와 행동에서 인간과 비슷하거나 인간 이상의 이해와 사고를 발견해낸다.  늑대라는 종 자체의 존재감이 인간의 존재감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말한다.  늑대라는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생각이 너무 많았고, 늑대에 대한 사랑이 많은 생각속에 섞여 혼란을 자아내는 듯 하다.  첫번째로 인간의 영역속에 들어와 적응한 늑대는 자체로서 인간과 어울려야만 하는 야생의 생명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남들이 보았다면 우려했을 만한 브레닌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해주었다는 점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일테고(이해를 못했다면 이 책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야생의 생명체를 인간의 공간안에서 키우는 일에 대한 사유는 저자도 충분히 표현을 해 내었다.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야생성을 거세당해야만 했던 브레닌의 모습이다.  저자는 늑대의 모습을 충분히 존중해주고 있긴 하지만, 이미 브레닌은 어릴적부터 야생성을 거세당하며 자라오고 있었다.  두번째로 저자는 브레닌과 살면서 다른 생명들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다보니 채식주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참치정도는 먹는 페스카테리언으로 변신하는데, 이는 철학적 사고와 생명존중에 의한 결과라기 보다는 넘쳐나는 생각과 벌인 일종의 타협으로 보인다.  인간의 잡식성은 당연한 본능이다.  이에 반하여 채식주의자가 되는 이유는 환경파괴와 대량사육이라는 비윤리적 생명학대에 반한다는 의미가 대부분이다.  물론 생명존중의 이유도 분명 존재하지만, 육식이 본능인 늑대에게까지 사료와 참치만 먹이는 일은 넘쳐나는 자신의 사유를 결국 늑대에게까지 강요하여 괴로움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의 생각이 좀 더 설득력을 얻으려면 개나 늑대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하는 경우 뿐만 아니라, 개나 늑대와 사람이 인간의 영역 외에서도 어울릴 수 있는 경우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비약이 좀 과한지는 모르겠으나 브레닌과 지내며 한껏 높아진 생명에 대한 철학적 사고와 존중의 수준은 현실적으로 그런 경우를 만들어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가져다 준다.  다른 철학자들은 이 책의 내용이 무척 심오하고 성찰적으로 보이는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너무 많은 생각을 안고 휘청거리는 저자의 모습이 곳곳에서 관찰되고 있었다.


  그래도 저자는 얼마나 근사한 사람인가!  늑대를 키운다는 일도 무척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늑대의 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며 사랑했고, 함께한 삶과 사랑 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충만하고 보람차게 바꾸었고, 사고는 깊고 풍부하게 가꾸었다.  나 역시 동물들을 좋아하여 어릴적과 군시절 직접 기르고 함께 지내던 개들을 이 책을 읽는 동안 떠올렸고, 앞으로도 여건만 된다면 덩치 좋은 개나 요염한 고양이들을 키워보고 싶은 생각을 더욱 키웠다.  이전의 다른 생명들과의 만남은 회상과 경험이라면, 생각을 점점 키우고 있는 지금의 내가 앞으로 함께 할지도 모를 동물들과의 만남에서는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저자보다는 조금 냉정한 견지를 취하고 싶긴 하지만, 내가 그들을 사랑하게 되면 나 역시 조금은 남다르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각의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저자와 늑대 브레닌은 나의 그런 욕구를 책 전체를 통해 자극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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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의 협동의 경제학 -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시대의 경제학 원론
정태인.이수연 지음 / 레디앙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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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경제학의 거짓말이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주류경제학의 발악적인 몸부림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류경제학을 비판할만한 대안경제학 또는 다른 경제학들은 이제껏 왜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주류경제학을 내세우는 경제기득권층이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시스템이 활용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만큼 우리는 딱딱하고 비인간적이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경제학의 프레임에 다가설 용기조차 없으면서도 철저히 활용당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경제논리에 대한 고민은 인간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대학자들이 인간의 성선설 성악설을 고민했던 때부터 주류경제학이 인간의 이기심이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전제까지..  인간의 본성은 끝없이 고민되면서도 마땅한 답이 없이 끝없이 활용되기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만나는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지 않다'는 답이다.  그것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인간의 본성이 시장이라는 공간을 만나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지는 이 책을 통해 깨달아갈 수 있다.  그리고 주류경제학이 말한 인간의 이기심이 결국 이런 파국에 가까운 위기를 만들어냈으니, 이 책이 말하는 시장의 원리를 만난 인간의 본성은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경제학이라고는 하지만, 편하고 재밌게 풀어쓴 책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읽기 편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수많은 경제학 원리와 법칙을 편하게 설명하면서 주류경제학의 오류를 짚어나가는 과정은, 여전히 주류경제학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 대한 의문과 답답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설령 주류경제학의 원리가 좀 더 탄탄하다 가정하더라도, 단 하나의 경제논리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고 운영의 기반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세상은 다양한 것들의 종합이라 하지만, 경제학만큼은 그렇지 않았음이 신기해질 따름이다. 


  대안의 시스템으로서 협동조합과 생태경제가 제시된다.  협동조합에 관하여는 개인적으로도 몇몇의 글을 통해 접해보았지만 여전히 생소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에밀리로마냐나 프랑스의 퀘벡, 그리고 베네주엘라의 차베스가 가난한 인민들의 경제력을 위해 추진했던 협동조합을 생각하면 협동조합은 분명 현재의 극심한 자본불평등 시대의 막강한 대안임에 틀림없다.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도입되는 협동조합 체제인데, 협동조합 기본법이 통과되었다 한들 대기업 자본가들의 불평과 은행권의 자본순환 구조환경에서 쉽게 정착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미 일부 생협의 대형화에 수익배당과 경쟁체제도입등의 본질에 어긋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 첨예한 것과 같이 협동조합의 순수성이 우리나라에 도입됨으로서 본질이 흐려지지는 않을까 하는 점도 걱정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협동조합은 공동출자를 통해 장기간의 기다림을 통해 서서히 이윤을 내는 방식인데, 이를 또다른 대박사업과 같은 대안으로 받아들여 섣불리 덤벼드는 현상이 생기지는 않을까?  다르긴 하겠지만 벤쳐열풍과도 같은 왜곡이 일어나지 않도록, 초기단계인만큼 차분히 지켜볼 필요도 있겠다.


  생태경제는 여전히 첨예하다.  반자본을 내세우는 방식의 생태경제도 있지만, 패러다임 자체는 국제적으로도 관심을 받고 있는 MB식의 녹색분칠도 생태경제의 한 모습이다.  자본력으로 쌓은 기술로 생태공존을 추구한다는 보수경제론자들의 생태경제는 무척 망상적이긴 하지만, 인류의 삶을 지금과 같이 유지케 하거나 비슷하게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형태의 생태경제론도 막막하긴 마찬가지이다.  과연 지금의 인류는 어디까지 포기해야하고, 세대를 거쳐 인류의 역사는 얼마만큼 후퇴하고 양보해야 하는가가 가장 큰 화두가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한성안 교수의 '상식이 그리운 시대, 인문학으로 풀어보는 블로그경제학' 이라는 책과 존 벨라미 포스터의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같이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책을 읽은 뒤, 사회의 다양한 관점에서 베블런의 진화경제학을 대입해보는 한성안 교수의 책과, 자본과 환경은 어떻게 타협점을 찾을까 하는 점에서 존 벨라미 포스터의 책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순서를 반대로 읽으니 물살을 거슬러 올라온 느낌인데, 그래서 그런지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과 경제학의 원리들이 좀 더 쉽게 다가오는 면도 있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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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 - 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개정증보판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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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릴적 나는 국어를 정말 싫어하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중학교로 진학하자마자 배우기 시작한 국어문법은 갑작스레 다가온 적응불능의 국어의 생소한 모습이었다.  두음법칙, 연음법칙 등등으로 설명되는 국어의 문법은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한글의 발음과 철자의 현상이지만, 그 당시 나는 갑작스런 혼란과 이해불가의 상태에서 국어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트라우마였고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2년간이나 담임선생님이 국어선생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어본고사를 치르지 않는 대학을 골라 진학하려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국어는 내 스스로 벽을 치고 접근자체를 불허했던, 심리적 트라우마 그 자체의 과목이었다.  국어, 그러니까 한글 또는 우리말에 지금도 내가 단어적 선택이나 표현의 매끄러움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아마도 그 시절의 트라우마에 기인하기도 할 것이다.


  2.

  그러던 내가 블로그라는 매체를 통해 글을 끄적이고 있다는 것은 트라우마에 이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이 국어를 잘해야만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싸움닭 길러지듯 공부를 해야만 했던 그시절의 상황과 더불어 한글로 된 글들 자체와 연관된 모든 행위에 심적 부담을 느끼던 내가 스스로 글을 지어내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벽을 넘어선 획기적인 변화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변화의 결정적 계기는 어느날 추천받아 읽었던 책들에서 기인했지만, 이후로 수많은 글들을 보며 느끼는 다양한 느낌은 딱딱하고 재미없는 국어의 문법이나 분석을 넘어서, 글의 표정과 감정과 모습들이 이토록 다양하구나 하는 깨달음이 섞인 친근감이었다.  욕심은 도를 넘어 글쓰기를 시도하였으나 여전히 어딘가 어색하고 표현력과 방식이 뒤떨어짐은 혹시 어릴적 딱딱하나마 체계적으로 학습하지 못한 한글의 골격과, 이에 대한 트라우마로 거리를 두었던 스스로의 벽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3.

  표현과 방식은 뒤떨어지나마, 말이나 글이라는 방식이 가지는 어떠한 특성들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조금씩 읽어온 바가 있다.  그래서, 단어가 가지는 의미의 다양성과 하나의 사물에 주어진 단어의 적확성, 그리고 발음과 의미의 연관성 등등에 대해 어느정도 기본적인 개념은 가지게 되었다.  아울러 말이 가지는 지역성과 말의 지역성이 가지는 문화적 특성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말에 배인 사회성까지 사유할 수 있는 어느정도의 깜냥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언어학이라는 주제를 통해 한글이 보여주는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과 언어의 바다에서 한글이 가지는 특성과 문화적 위치 등등을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해주는 책이다.  한글을 포함한 수많은 언어들은 인간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레 나오긴 하지만, 흘러나오는 말들은 단어와 소리 하나하나엔 광활한 풍경과도 같은 방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다른 관점에서 확인하게 되는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4.

  고종석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수년 전, 지인이 그의 글을 좋아한다며 읽어보기를 권했을 때 들었던 이름에서부터였다.  사실 읽고 싶은 책들 속에서 고종석을 만나는 일은 그닥 관심이 가지 않은채 지내오다 최근 트위터 속에서 만나 그의 멘션을 본 것이 그의 글을 대면한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의 소설 '해피 패밀리'가 두번째 만나는 글이었다.  이후로 만난 것이 이 책을 통해서였는데, 언어학적으로 한글에 대해 풀어내는 그의 글 이야기는 위에서 했으니 이 책에 실린 몇 편의 서평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그의 글은 어딘가 게으른 듯 하면서도 납득할 만한 여유가 느껴진다.  언어학 이야기만큼 분석적이지는 않지만 상대의 느낌과 평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 자신의 것으로 녹여낸다.  여유로운 자가 받아내는 상대의 기분같달까?  무딘듯 편향되지 않고 균형이 느껴지는 글이 사실 나에게는 조금 지루함을 느끼게 하지만, 그의 글은 여유롭고 균형잡혔다는 면에서 또다른 표정과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트위터에서 왜 그리 어수선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지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나서 강하게 다가오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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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장사 - 대한민국 의료 상업화 보고서
김기태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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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흔하게, 일정수련과정을 이수한 후 봉직의가 되거나 개원의가 되면 ‘강호의 세계에 뛰어든다’ 말한다.  아직 그런 ‘강호의 세계’에 대한 감이 없던 때엔 열심히 성실하게 환자를 대하다보면 ‘강호의 고수’가 될 수 있겠지 하는 순진한 생각을 머금기도 했었다.  하지만, 강호의 세계에 뛰어든 4년 남짓의 봉직의 생활과 주변에서 들려오는 선배나 동료의사들의 이야기들에서 깨닫는 것은, ‘강호의 고수’는 단지 성실함이나 의학적 실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더라라는 것이다.  이미 병원은 어정쩡한 영리병원의 형태로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정점에 근접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안에서 의사들은 가감없는 말로 ‘신음’중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돈밝히는 의사’는 과거에도 많긴 했다.  그리고 상당한 비난도 받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과거와 같이 ‘돈밝히는 의사’를 비난하기는 많이 어려워졌다.  과거의 의사는 온전히 자신의 부를 위해 돈을 밝혔지만 지금은 생존과 유지를 위해 돈을 밝힐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돈을 밝혀야하는 의사들을 폭넓게 양산하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으로도 봉직의 생활을 하면서 알게모르게 ‘실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야 한다.  환자 하나하나에 대한 적합한 치료권유나 정성보다는 달 단위로 병원실적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가가 지금의 내 자리를 유지하는 데 있어 무척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 현실이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기에, 내 주위에서 들리는 병원에 다녀오는 사람들의 의사에 대한 불만은 한 단계 자체적으로 걸러지며 때로는 비난의 대상이 된 그 의사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마저 들 정도이다.

  분명한 것은 의료는 산업이 되어버렸고,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체제의 한 톱니바퀴로서 역할을 도맡으며 이윤추구의 장이 되었다.  그것은 의료의 사회적 역할과 본질에 비추어 보았을 때, 분명히 잘못된 모습이다.  그와 동시에 언론이나 여론이 이런 현상을 의사들의 잘못으로만 매도하는 것도 분명 잘못된 모습이다.  이유는 위에서 말했던 대로이며, 이 책 역시 그 이유를 매우 적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의료가 공공재로서 충실하게 역할하기를 바라는 개인의 입장에서 이 책은 현재의 의료가 왜 점점 망가져가는 지에 대해 매우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생각한다. 

  의료보험으로 시작하여 건강보험으로 이어진 제도는 분명 좋은 정책이다.  문제는 의도적인 저수가정책으로 일관하여 변화하는 경제적 환경안에서 의사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과, 더디기만 한 건강보험의 보장수가율 변화와 대상확대, 그리고 사보험과의 경쟁에서 점점 우위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료를 이윤율 추구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전락시킴으로 개개의 의사가 이윤추구를 위해 뛰지 않으면 안되는 환경이 조성된 현실은 의사가 어쩔 수 없이 환자를 쥐어짬으로서 병원조직에 인정을 받고 자영업자로서 생존을 추구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을 일반화시켜 ‘의사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은 상당한 비중을 가짐이 사실이다.

  거기에 빅5라 불리는 병원들의 독식은 교통시스템의 발달에 더불어 심화되고 있고, 한 술 더 떠서 환자들이 요구하는 좀 더 질 높은 의료서비스에의 욕구는 그들의 독식을 부채질한다.  물론 환자들의 그런 욕구를 무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변방의 많은 병원들과 의사들은 상대적으로 생존과 실적에 대한 압박을 더욱 가중받는다.  이는 국가나 제도가 나서서 질환의 중증도관리 등등의 교통정리를 통해 환자분산을 해주어야 할 문제이지만, 산업화가 본격화되고 자본화가 심화되면서 그런 역할은 성장논리에 맞지않는 불필요한 일이라 치부되어버렸다.  하지만, 책에서도 나오듯, 영리병원 또는 영리를 추구하는 대형병원이 더 나은 서비스와 의료의 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는 그러한 평가가 이제서야 시작되고 있고 이 책에는 그러한 첫 결과를 소개한다.  빅 5병원을 시기하는 것이 아닌, 환자들의 의료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필요함을 생각하는 개인적 입장에서는 무척 반갑기도 한 대목이다. 

  최근 개인적으로는 포괄수가제에 대해 작은 목소리로 몇 번 성토한 일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포괄수가제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공공재로서의 의료가 완벽히 역할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포괄수가제는 의사를 두번 쥐어짜는 제도일 뿐이다.  항간에 개원가에서는 포괄수가제에 따른 수당에 그나마 수익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저수가를 바탕으로 책정된 수당과, 질환에 대한 진단으로만 묶어버려 환자의 처치나 경과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다양한 변수들에 대한 완충이 전혀 없다시피 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없이 불편하고 불합리하기만 할 뿐이다.  출혈이 심한 치질환자에게 수혈과 증상완화에 필요한 처치, 그리고 대장내시경까지 생각하다보면 가장 필요한 수술은 현재의 포괄수가제 안에서는 입원 한 번으로 모두 해결할 수가 없었던 개인적 경험도 있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저렴하고 적정한 비용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어 좋겠지만, 제도가 어느 한쪽의 일방적 희생을 바탕으로 성립이 되는 것이라면 그 제도는 합리적으로 고쳐나가야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심평원과 건강보험은 그럴 의지도 없어보이고, 의료의 산업화와 병원의 영리화에 대한 비판도 없어보이며, 오히려 그런 추세에 무언으로 동조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듯 보인다. 

  의료는 어떤 입장에서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개개인의 질환과 경과에 대해 확답할 수 없으며, 환자의 기대나 시술이나 처치의 효율앞에서 다른 이면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정치적으로는 의사들의 오랜 콩가루성향이 지금의 이런 불합리와 의료왜곡을 자아낸 원인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시스템이 이런 성향과 무관심을 최대로 활용하여 밀어붙이는 느낌이다.  터져나오는 의사들의 발언과 행동은 그것 그대로 환자들을 담보로 하는 무책임하고 위협적인 이기심으로 돌변하는 현상을 보면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좀 더 체득하고 공부 한 후에 풀어보기로 하면서 여기서의 말은 일단 접어두며, 본질이 왜곡된 의료산업과 그 안에서 의사들의 처지가 알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읽고 난 후에는, 이 사회에서 양심적인 의사들은 대체 어디갔는가를 한탄할 것이 아니라, 양심적이고 싶은 의사들에 대한 응원을 좀 해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본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 서로간의 이해와 응원이 세상이 좀 더 바를 수 있는 작은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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