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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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 화려하게 빛나는 시내 한복판의 어딘가로 사라지는 그의 등은 투박하고 무채색이었다.  들뜬 화려함 안으로 들어가지만, 절대 섞일 없을 같은 무게를 안고 있었다.  낮과 밤을 젊어서부터 하던 대로 열심히 일하며 소박한 삶을 꿈꾸었다.  고단한 삶을 이어 얻은 것은 그의 바램대로 소박한 가정과 살림이었지만, 세상에 점점 파묻혀가는 것만 같은 기분은 지워지지 않았다.  기억 아버지의 모습은 그러했다.  


  살고 싶은 곳에서 로망이나 추구하며 살았던 길지 않은 시간이, 실은 현실의 파고와 변화 앞에서는 적지 않은 실수이자 독이었음을 깨달았던 때가 있었다.  깨달음의 여파는 여전해서, 앞으로의 현실에 어떤 수정과 변화를 주어야 고민이다.  누리고자 하는 행복과 옳다고 믿어오던 일과 삶의 방식들이, 시간에 따라 흐르는 현실의 파도 위에서 점점 휴지가 되어 녹아 부수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무척 아팠다.  삶의 방식에 입을 다물고 이상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사람들, 너는 이렇게 변해야 한다고 나직이 조언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화려함 안으로 무채색이 되어 조용히 가라앉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모습과 겹쳐졌다.


  소시민적 삶과, 옳다고 믿었던 것들을 지키는 일은 틀림에 가까운 세상이 되었다.  아니, 가깝지 않은 과거 어느 시대에서부터 그런 것들은 변화에 녹아 사라져야 하는 신념이 되었다.  경제발전과 자본의 급격한 부풀림 안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과 판단의 기준을 삼아야 하는 것은 분명해지면서 단순해졌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풀려지고 드높아진 세상의 화려함 안으로 파묻혔다.  이색적인 과거의 모습이 되거나, 사다리의 아래에서 분주해져야 했다.  힘들고 버거움은 당연한 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 같은 시간을 살았다.  누군가는 부풀고 드높아진 세상의 높이에 서서 기름진 얼굴로 내려다볼 , 그들은 마르고 굽은 등으로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누군가는 변화한 세상에의 적응에 만족스러워 했지만, 그들은 너무도 변해버린 세상의 모습에 낯설어했다.  과거를 추억하던 장소가 사라지고, 감정의 어느 지점에서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던 풍경과 하늘이 사라진 모습에 슬퍼했다.  익숙했던 자리에서 낯설음을 느끼는 그들은 옳지 않은 삶을 살아왔던 것일까?  그런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독자는, 어째서 적절한 존중과 아련한 추억이 아닌 나직한 슬픔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요구르트 장수의 아들이자 보자를 팔면서 삶의 위안을 찾았던 소시민 메블루트, 그를 둘러싼 이스탄불의 수많은 모습들과 터키의 여러 관습들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변화한다.  그가 늙어가는 시간과 그를 둘러싼 세상이 변화하는 시간은 같지만 속도는 달랐다.  보자를 팔러 다니던 골목은 무섭도록 변했지만, 그는 여전히 보자를 팔러 골목을 다니는 일에 만족한다.  주변사람들은 그가 조금이라도 변했으면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만족과 위안 안에서 머무른다.  그는 그의 마음을 낯설게 만든 변해버린 골목 안에서 그의 죽은 아내 라이하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선언한다.  낯선 마음과 신념같은 답답함이 내게 낯설지 않음은, 나와 내가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이 메블루트와 비슷해서였다.  그리고, 메블루트가 살아온 이스탄불의 시간이, 나와 아버지가 살아 한국의 시간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메블루트의 어깨가 내려앉은 이유는 비단 보자 바구니가 걸린 나무막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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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사라지는 세상 - 출산율 제로 시대를 바라보는 7가지 새로운 시선
조영태 외 지음 / 김영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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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나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결코 가볍지 않은 심리적 부담을 느끼는 일이다.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지 없는 교육과, 폭력과 안전에서 시선을 놓을 없는 환경, 그리고 아이는 행복할 있을까라는 끊임없는 의문이 부모를 피로하게 만든다.  부모의 자체도 가족과 육아라는 시선에서 바라보면 점점 부담스러워진다.  세상은 점점 편해지고 풍요로워졌다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점점 지쳐한다.  이에 비례하여 육아의 피로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진다.  이유가 파악되지 않는 피로와 부담이 쌓여서 세상은 상식적이지 않은 기현상을 곳곳에서 보이고, 결혼과 출산은 급격하게 감소한다.  단순한 셈법으로도 가정에 아이는 둘이 있어야 사회인구수는 유지되지만, 우리나라의 출산률은 1 이하로 떨어졌다.  그것이 수많은 나라들 , 한국에서만 보이는 현상이라면, 한국사회는 어딘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출산률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현상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대책을 세워 보았지만, 책에서도 단정했듯 정부의 대책은 실패했다.  전국 가임기 여성 분포도같은 황당한 자료를 내기도 했지만, 정부도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사안에 나름 심사숙고했을 것이다.  문제는 출산률 저하는 어떠한 정책으로도 통제나 조절이 가능한 성격의 사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인간의 본능 앞에서, 인위적인 정책은 직접적 조절자가 아닌 주변에서의 조력자일 뿐임을 증명한 셈이다.  그렇다면, 출산률이 떨어지는 근본적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의문을 다시 접해야 한다.  이제껏 원인으로 지목했던 요소들을 배제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책은 그렇게 다시 접한 의문을 앞에 두고 새로운 시선으로 원인을 지목한다.  물리적 심리적 밀도의 증가, 행복감의 감소, 세대간 사고와 환경의 차이에 따른 갈등, 급격한 인구증가 이후의 자연스런 감소경향, 그리고 풍요와 화학물질이 가져온 생물학적 환경의 변화.. 종합해보면, 한국사회의 현재는 급격한 발전에 따른 결과로 너무 많은 인구 안에서 너무 치열한 경쟁상태에 빠져 있다.  그것이 행복감을 줄이고 불안감을 늘린다.  그런 환경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생존에 불안을 느끼고 불안은 출산의 욕구마저 저하시킨다.  급격한 발전은 세대간 사고방식의 차이를 증폭시키고, 그것이 젊은 세대의 불만과 불안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한다.  미시적으로는 증가한 불안이 생존을 위협하고 번식의 욕구를 억제하는 사회형태를 관찰할 있고, 거시적으로는 급격한 발전과 인구의 폭증이 자연적인 인구감소 경향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접어든 것이다.  내가 파악한 바로는 책은 정확하게 정도 선에서 원인을 분석한다.  


  선에서 단계 넘어서 생각해보면, 문제는 한국사회의 근대화 발전과정에서 발견된다.  제대로 복지나 사회안전망없이 다수 노동자의 희생으로 대기업 중심의 성장을 이룬 나라이다.  이후에도, 발전은 제대로 분배정책 없이 세계에서 손꼽는 최장의 노동시간 아래 사람들을 혹사시켜온 나라이다.  그러면서도 교육수준은 올라가고, 해외로의 시야는 넓어졌다.  비교의 대상들이 많아진 것이다.  유일한 신분상승의 수단이었던 교육도 가진 돈이 없으면 불가능해지고, 부동산 자본 앞에서 노동은 점점 가치를 잃어간다.  한국사회가 이제껏 다루고 관리해 자본의 문제가 사실 이런 현상을 야기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실은 엄청난 의지와 각오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나는 책에서 다룬 새롭다는 시선이 새롭지 않게 느껴졌다.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각자의 관점을 담았지만, 결코 어렵지 않은 문턱 하나만 넘어 들어가면 한국사회의 자본 문제임이 쉽게 드러난다.  그것이 참여자들이 제기한 문제들의 바로 위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새로운 의문이 다시 생긴다.  책의 참여자들은 정부의 출산정책을 비판하면서도 자본의 문제는 건드리려 하지 않았는가.


  새롭고 잠재적인 시선이 보였다.  비슷한 직업군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스트레스로 인한 탄수화물의 과다섭취, 그로 인한 비만과 호르몬의 교란, 난임과 불임의 증가.  물론 시나리오는 현재 출산률 저하에 기여한 부분이 극히 적을 것이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에서 잠재적 위험요소임에는 분명하고 점점 대두될 것임 역시 분명하다.  이미 환경호르몬이라는 위험요소에 대해서는 십수년 전부터 제기되고 있다. 자본을 원인으로 지목했을 , 그에 따른 사회의 변화와 발전이 인간의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생물학적 분석은 아직 새롭다.  새로움을 넘어, 원인에의 적확한 지적이 되고, 이것이 출산률을 증가시킬 있는 전환의 시작점이 것인지는 보아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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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개뿔
신혜원.이은홍 지음 / 사계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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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평등에 대한 모든 논의는 대부분 공감을 하면서도 쉽지가 않다.  그것은 여전히 한국사회를 뒤덮는 가부장의 인식 안에서 알게 모르게 편의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한국 남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알게 모르게 누리는 편의 안에서 실천은 느려진다.  느려지는 실천만큼, 인식의 변화는 공감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 책의 말미에서 우려했듯, 나 역시 ‘센 여자’를 충분히 느꼈다.  


  ‘센 여자’를 느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 성 평등에 얼마나 다다랐느냐는 기준은 아니다.  당연하다는 인식과 공감과, 어딘가 불편함의 괴리의 차를 확인하는 일이다.  사실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은 역동적인 변화와 운동 안에서, 집단끼리 편의와 권력을 주고받는 영원한 경쟁체제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공감과 합의일 것이다.  공감과 합의를 통해 균형을 이루는 것이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일 것이다.  

  한국사회가 여전히 들끓는 이유는 공감과 합의가 부족하고, 그로 인해 균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 차이가 점점 줄어드는 세상에서, 가부장에 따른 역할 차이의 일방적 강요가 자발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신체적 차이에 따른 역할과 희생의 강요는 정당한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 답할 한국사회의 구성원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암묵적으로는 이제껏 이어왔던 구조와 강요된 인식에서 벗어나길 거부한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괴리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이 ‘센 여자’를 만들어냈다.


  ‘센 여자’는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결과적 인격이다.  ‘어째서?’라는 합당한 의문이 합리적 문제제기로 진화하는 것과 동일하다.  걸어오는 싸움에 반응하는 반사적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은 ‘센 여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센 여자’를 만들어 낸 한국사회에 가 닿아야 한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보편 흐름과 가부장 안에 존재하는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는 일이다.  나는 누군가의 희생을 모른 체 하며 지금의 편리를 누리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느끼는 어떤 괴리는 성 평등 인식과 행동 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결국, 스스로의 합의를 도출해내야 하는 과정의 시작이고, ‘센 여자’는 그런 합의에 가 닿아야 하는 저마다의 의식의 출발선인 셈이다.    


  읽는 내내 ‘82년생 김지영’이 떠올랐다.  자본이 점점 강해지는 방향으로 변하는 사회 안에서 남녀의 역할 차이는 점점 줄어드는데 여성의 역할이 의도적으로 폄하된다.  거기에 가부장적 역할 강요가 여성을 억누르고 결국 미칠 지경에 이르는데, ‘센 여자’는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가 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안고 소소한 혁명 같은 실천을 해 나간다.  프리랜서와 귀촌의 삶 안에서 문제제기는 자본주의보다는 가부장 사회에의 저항에 좀 더 닿아 있다.  성 평등이 한국사회와 갈등하는 지점이 좀 더 근본적이다.  위에서 합의와 균형이라는 표현을 썼듯 나는 완벽한 성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고, 현재 대두되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온전하게 동의하지 않는다.  주변만 둘러보아도 내부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여성들의 수많은 목소리가 존재하고, 소외된 채 방치되는 여성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그렇지만, 변화는 필요하고 변화가 보고 나아가야 할 목표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변화와 변화의 시작, 그리고 변화가 닿아야 할 종착지점을 가장 쉽고 근본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괴리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비판의 꺼리가 아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괴리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한국사회에서 성 평등을 향한 변화는 절실한 문제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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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편애 - 음악을 편들다 걷는사람 에세이 5
서정민갑 지음 / 걷는사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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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을 좋아하지만, 사랑할 수는 있을까?  지금 사랑을 누리고 있는 이들을 보면 한없이 부럽다.  사랑을 받고 있는 이에 대한 시선이 아니다.  자신 앞의 대상에 한없는 사랑을 전하는 사람, 전한 사랑을 다시 피드백 받으며 영원할 같은 선순환의 행복 안에서 천천히 부유하는 사람..  그런 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무언가를 사랑할 있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이제 , 음악을 사랑하는 이의 길고 편애의 기록,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리고, 역시 좋아하는 음악, 아니 음악을 대하는 나의 감정을 되돌아 보았다.


  음악을 좋아한다.  점점 재즈로 편향하는 나를 느끼지만, 음악은 취향이기에 그런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이미 고전인 유명한 곡들을 제외하면 제목도 모르고 듣는 수많은 재즈음악을, 그저 좋아하니 정도 수준에서 듣는다.  유명한 아티스트나 앨범, 그리고 제작자 위주로 듣는다.  그러니, 재즈의 황금기라 불리는 50-70년대 발표된 곡들에만 귀가 몰린다.  사용된 악기들, 연주자마다 다른 스타일 등등은 거의 모르고 듣는다.  요즘에는 음원으로 바로 검색해 듣는 시대이건만, 나는 최근의 재즈경향을 알려하지 않고 찾아 듣는 데에도 게으르다.  이게 나의 음악 취향 수준이다.  내가 음악을 또는 재즈를 사랑한다 말할 없는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음악을 사랑할 아는 이가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은 남달랐다.  음악을 부드럽게 분석하고 조심스레 설명한다.  아티스트, 앨범 또는 곡을 둘러싼 배경을 이해하고, 그것이 음악에 어떻게 녹여져 있는지 파악한다.  모든 설명은 조심스럽고 겸손하다.  비판조차도 그러하다.  평론가가 아닌 의견가라는 스스로의 직함답게, 조심스러운 걸음과 손짓으로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배려하며 의견을 개진한다.  그리고, 이런 음악들도 있음을 넌지시 건넨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아티스트들, 음악들.. 실은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좋은 음악이 있음을, 커튼을 천천히 열어 밖의 너른 풍경을 보여주듯 써내려간다.  간단한 검색으로 간편한 음원을 다운받아 어떤 노래든 들을 있는 세상에서도, 음악을 찾아보려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그런 노력이, 우리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며, 상처를 보듬어 주는 노래들과 만나게 준다는 사실을 나직하게 힘주어 이야기한다.  


  음악에의 길고 편애를 써내려간 저자는 내가 아는 , 악기를 직접 다루지 않고 노래를 직접 발표하지 않는 이들 가장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가 음악을 사랑하는 모습은 일종의 덕후질이 아니다.  끊임없이 듣고 읽으며 찾아본다.  깨닫고 알게 사실을 누군가와 나누려 애쓰고, 너른 긍정과 조심스런 부정 안에서 음악이 사람들을 위로하고 즐겁게 한다는 사실을 쉼없이 증명해 낸다.  세상의 많은 모습은 음악과 연결이 되어 있고 음악은 세상의 일부일 밖에 없음을, 그래서 세상이 변할 음악도 변화함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변화는 아름답고 포근함을 믿는 사람이다.  그가 음악을 사랑하는 모습은,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나직한 주장이다.  무엇을 사랑하든, 사람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맹목과 아집이 판을 치는 세상은 어떻게 망가지는 것인가 깨달아가는 요즘이다.  그의 사랑법은, 맹목이나 아집이 아니다.  편애일지언정, 세상을 아름답게, 곧고 탄탄하게 직조하는 열정과 원칙의 사랑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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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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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공터에서 피부빛이 창백한 사람이, 저보다 커다란 무언가와 뒤엉켜 겨루고 있다.  쉽게 끝나지 않을 듯한 겨루기에, 인간은 땀과 긴장으로 뒤범벅이 되어 점점 수척해진다.  긴장과 몸의 중심이 조금이라도 풀어지면, 그는 자신의 허리를 거머쥔 상대에게 넘어뜨려질 것이다.  넘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는 어떻게든 버텨서 싸움을 자신의 승리로 마무리해야 한다.  


  싸움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이들에 둘러싸여 있다.  한쪽은 가운을 입고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의료인들의 무리다.  다른 쪽은 그를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다.  다들 긴장과 숙연한 표정으로, 누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애타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누구는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누구는 마음이 아파 고개를 돌린 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처절한 싸움에 다가갈 없다.  싸움은 철저하게 그의 고독이다.  아프다는 것은 그런 외로운 싸움이다.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 고통을 나눌 수도 없다.  몸의 고통은 오로지 나만의 , 의료는 고통을 줄이고 치유를 서두르기 위한 보조일 뿐이다.  주변의 관심과 도움은 싸울 힘을 유지하는 지지와 응원일 뿐이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다.  거의 모든 것들은 철저하게 자신이 겪어내고 해결해 내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말을 건네는 것이, 실은 그다지 도움도 위안도 되지 못함이 이를 증명한다.


  질병이라는 거한이 앞에 나타나 커다란 손을 몸에 대는 순간, 몸의 감각과 보이는 시야 그리고 머리의 생각은 달라진다.  철저하게 외로워지고, 외로움 안에서 세상의 다른 감각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고통은 괴롭지만, 고통으로 인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진다.  자연스럽고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고통으로 인해 의미를 달리한다.  나는 어째서 그러했는가, 지금의 나는 ?, 그리고 나의 미래는 어떻게 것인가의 두려움..  


  아픈 몸으로 산다는 것을 사실 나는 아직 모른다.  잠깐의 경험으로 내가 어째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품어 적은 있다.  그러나, 나의 목숨을 뒤흔들 정도로 심각한 질병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직은 나의 능력 밖이다.  그런 질병으로 아파하는 환자들을 많이 마주하고 치료했지만, 나는 그들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위선자가 된다.  나의 지식은 그들이 아픈 이유와 아프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일 뿐이다.  아픈 몸이 어떻게 세상을 감각하고 바라보며 느끼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없다.  그리고, 사회의 구조 안에서 아픈 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처지가 되어서, 감당해내야 하는 인간관계와 사회제도의 다양한 얼개를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위에서 글로 묘사한 그림 구석진 곳에 진지한 표정의 사람일 뿐이다.  


  아픈 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통찰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중요하고 비중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례할 있음이고, 우리는 얼마든지 아플 있기에 무례함으로 상처받고 내쳐질 있다.  그러나, 아픈 몸을 통찰함으로 온전히 수는 없다.  아프다는 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경험이고, 우리는 경험을 타인의 시선으로 존중할 밖에 없다.  아픈 몸으로 이들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온전하게 이해할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픔을 피할 있다는 것은 정말 커다란 행운이다.  아픔을 피하기란 그만큼 어렵다.  우리는 앞에 언제 나타날 모르는 질병의 마수에 침착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파하는 이들에 전하는 염원이 온전히 닿을 있도록 기도하는 연습도 필요하다.  닿을 없지만, 결국 겪어야만 하는 것이 아픈 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픈 몸으로 사는 이들을 온전하게 존중하고 있는가를 항상 고민하지 않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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