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의 빨간 수첩
소피아 룬드베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연말연시 사람들의 마음은 바빠진다. 고등학교 동창모임, 대학교 동창모임, 회사 송년회, 동호회 송년회 등 내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과의 약속으로 평일 저녁 시간이 가득 차고, 서울 번화가 식당마다 송년회 모임으로 북적북적하다. 우리는 그렇게 항상 사람들과 함께 연결되어 있으려고 하고, 또 내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과 연락하며 그들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들과 SNS로 끊임없이 소통하고, 연결되어 있으려고 한다. 그래도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내가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때에 사람들과 쉽게 연결되고, 나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도 소통이 가능한 시대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때에 살던 사람들에게 '연결'이란 무엇이고, '소통'이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은 100살을 눈앞에 둔 할머니의 기억과 기록에 의해 진정한 소통과 연결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1. 진부하지만,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해 주는 단어...사랑.
도리스 할머니는 스웨덴의 서민 가정에서 안온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무뚝뚝하고 많이 배운 것도, 경제적 능력도 뛰어 나지 않은 아버지이지만 딸에게 빨간색 가죽 수첩을 선물해 줄 줄 아는 다정다감한 아버지 밑에서 안정감있는 소녀 시절을 보내던 도리스는 갑작스런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평온한 삶에서 떨어져 나오게 된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조금은 약하고 힘이 없던 어머니는 가장을 잃은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지 막막한 나머지 10살을 갓 넘은 그녀를 부자집에 가정부로 보내 버린다. 부자였던 주인 여자는 도리스를 데리고 스웨덴을 떠나 파리로 삶의 거처를 옮기고, 프랑스어를 하나도 못했던 그녀는 프랑스어를 배우며 낯선 파리에서의 삶을 살아 나간다. 그리고 파리에서 힘들 때면, 스웨덴에서 가정부로 일할 때 주인집에서 열리는 예술가들의 파티에서 만났던 젊은 예술가 예스타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쓰며 스웨덴에서의 추억을 붙잡고, 파리에서의 삶을 지탱할 힘을 얻는다. 그러던 중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패션 모델로 일을 시작하게 되고, 힘들지만 혼자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독립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으로서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파리의 부자들 앞에서 마네킹처럼 살아야 하는 팍팍한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편지를 쓰고, 책을 읽으며 자신의 삶을 지탱해 나가던 도리스는 어느날 공원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운명의 남자 앨런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앨런과의 사랑은 그가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면서 갑작스런 종결을 맞이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엄마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와 어린 여동생이 파리로 보내졌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녀는 전쟁의 광기로 물든 유럽에서 어린 동생과 살아내느라 앨런을 잃은 슬픔을 느낄 틈도 없지만, 미국으로 오라는 앨런의 편지를 받는다.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도리스는 여동생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지만, 미국에 도착해서는 막상 앨런의 편지가 무려 1년여 전에 쓰여진 것이고 그 사이 앨런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어 한마디 할 수 없는 그녀에게 미국에서의 삶은 너무나 녹녹치 않았지만, 그녀는 스웨덴에 남아있는 예스타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며, 고단한 삶을 이겨나간다. 그러던 중, 스웨덴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던 어떤 한 남자의 도움으로 한 가정집에 머물게 되고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동생은 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게 되지만 임신 중독증으로 아기만 남겨놓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어린 조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앨런에 대한 사랑, 자신의 모든 것이 있었던 유럽에 대한 강렬한 이끌림으로 그녀는 어린 조카를 남겨두고 천신만고 끝에 유럽에 도착하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 잠겨버린 유럽에서 앨런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린다. 그녀는 그렇게도 오랫동안 편지를 왕래하며, 우정을 나누어 왔던 예스타가 있는 스웨덴으로 돌아가 그가 예술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가정부로 그의 삶의 한켠에 서서 평생 그와 깊은 우정을 나눈다. 그리고 그녀가 죽음을 앞둔 96세에 그녀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 목숨보다 사랑하며 지켜냈던 여동생이 낳았던 딸의 자녀, 도리스의 종손녀 제니였다. 그녀는 종손녀인 제니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며 사랑으로 그녀를 키워냈고, 그 깊은 사랑을 받은 제니는 자신에게 엄마와 같던 이모 할머니인 도리스에게 그녀의 평생의 사랑인 앨런과의 사랑을 확인시켜 줌으로서 서로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랑' 그리고 '삶'의 소중한 추억을 지켜내고, 선물해 준다. 도리스와 도리스 삶에서 중요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진정한 소통이 도리스의 삶을 지탱하게 했고, 본인은 어린시절 어머니를 강제로 떠나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 기억을 종손녀 제니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도리스의 따뜻한 마음과 강인한 정신력이 제니에게 안정된 가정과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소중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2. 글쓰기, 그리고 기억.
도리스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국인 스웨덴을 떠났고, 나이가 들어 예스타에게 돌아가기 전까지는, 스웨덴어를 쓸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스웨덴어를 기억하고, 스웨덴에서의 어린시절의 추억과 그녀의 뿌리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평생 끊임없이 예스타와 편지를 썼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당시에는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해 평생 파리를 꿈꾸기만 하며, 평생 외롭게 예술가의 삶을 살아갔던 예스타는(사후에 그의 작품은 아주 높게 평가받아 그의 작품이 엄청난 금액으로 거래되는 것을 보며, 도리스는 예스타가 그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을 너무 마음 아파 한다) 그녀의 글쓰기 실력을 인정해 주었던 유일한 친구다. 전쟁, 가난과 같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도리스는 글쓰는 일에 몰두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남겨준 빨간색 노트에 그녀의 인생에 중요한 사람들의 이름을 남기고, 빈 종이에 종손녀 제니에게 들려줄 그녀의 삶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며 희미해져가는 기억과 감정을 남긴다. 그리고 그녀의 평생의 사랑이었던 앨런에게 끊임없이 프랑스어로 편지를 쓰며, 파리에서의 그와의 추억과 사랑을 끊임없이 재생산해 낸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종손녀 제니에게 전해지고 제니는 할머니의 삶에서 자신의 뿌리와 삶을 지탱해 나갈 힘, 그리고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의 힘을 배운다. 도리스의 죽음 후 그녀는 미국에 살던 제니와 스웨덴에 사는 도리스의 삶을 연결해 주던(스카이프를 통해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화상통화를 항상 해왔다) 노트북에서 도리스가 제니에게 남기는 마지막 유언을 보게 된다.

 

제니, 삶을 두려워하지 마. 그냥 살아. 네가 원하는 대로 사는 거야. 웃어. 인생이 너를 즐겁게 해주는 게 아니라, 바로 네가 인생을 즐겁게 해야 하는 거란다. 기회가 오면 과감하게 그것을 잡아.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 좋은 것을 이뤄내라. 세상 무엇보다 널 사랑한다. 언제나 그랬어. 그걸 절대 잊지 마라. 내 사랑하는 제니.
P.S. 글을 써! 그게 너의 재능이야. 재능은 사용해야 하는 거야.

부랴부랴 저녁에 퇴근하면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느라 항상 시간을 촉박하게 쓰는 나는 아이가 깰까봐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출근 전 새벽시간에 이 책을 조금씩 읽어 나갔다. 내 책상에 있는 책은 회사 업무 관련 도서, 이런저런 실용서적이기에 소설책은 사실 정말 오랜만에 잡았다. 머리속은 항상 이런저런 해결해야 하는 과제들로 복잡했기에 이 책을 펼치기 전, 이 소설에 제대로 몰입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도리스 할머니의 삶에 완전 몰입되었고, 도리스 할머니의 삶의 여정에 따라 어느날은 축축한 날씨의 스웨덴에, 어느 날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파리에, 어떤 날은 낯선 이방인의 땅인 듯한 미국에 함께 있었다. 매번 다음 장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해서 깜깜한 새벽, 도둑 고양이처럼 침대를 살금살금 빠져나와 도리스 할머니의 삶의 여정에 함께 하였다. 나의 글솜씨는 너무나도 비루하고, 그리고 무언가 기록으로 남기기에 내 삶은 그냥 하루 24시간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계바늘처럼 너무 지루하고 평범하다고 느껴왔기에 나에게 글을 쓰라고, 나에게 글쓰기 능력이 있다고 항상 얘기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한번도 진지하게 받아 들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도리스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고 난 후 지금, 나도 글로 내 하루하루와 삶의 느낀 점을 남겨야 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책은 기록만이 우리의 삶의 숨쉬게 하고, 우리의 기억을 보존하고, 글을 쓰는 것은 삶을 끌어 안는 가장 강력한 행동이고 무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그리고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삶을 소생시키는 여성들의 삶과 역사가 다시 한번 느껴지는,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더없이 다행이라고 느껴지고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소설이었기에 매일 매일의 하루를 열심히 살아나가는 이땅의 수많은 엄마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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