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정석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참으로 기가 찬다. 이 책의 광고라고 새움 출판사가 만든 카드 광고 말이다. 첫 장부터 이방인 속 뫼르소의 살해는 햇볕 때문이었다는 주장은 오역이 만든 잘못된 해석이다. 방아쇠를 당긴 그의 행동은 정당방위였다.”라니, ,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를 총체적 난국이다.

 

먼저 이 책 자체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사실상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어쨌건 이방인에 대한 이 책의 저자 이정서의 독특한 해석과 번역 관련 주장이 이 책의 내용 중 일부이고, 또 책 광고에서 가장 앞에 내세울 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부분이니, 이를 비판하고 이것이 왜 틀린 주장인지 드러내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 그리 빗나간 기획은 아닐 것이다.

 

 

1. 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정당방위

 

먼저 이방인에서 살인 장면을 요약해 보자.

 

뫼르소는 레몽을 별장으로 데려다 준 뒤 걷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미 뫼르소는 태양과 무더움에 괴롭다고, 태양과 태양이 쏟아내는 취기를 이기고자 집중한다고 한다. 그러다가 샘터 근처에 이르고, 샘을 떠올리고 그늘에서 쉬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샘터에 그 직전에 레몽과 싸웠던 아랍인이 혼자 누워 있다. 뫼르소와 아랍인 사이는 10m 정도 충분히 거리가 떨어져 있다. 뫼르소는 그냥 돌아간다면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햇볕을 참지 못하고 샘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간다. 아랍인은 누운 채로 칼을 빼든다.(뫼르소에게 더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셈이다.) 그 칼날에 햇빛이 반사된다. 땀이 흘러내려 뫼르소는 눈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뫼르소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태양, 이마에서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를 들으며 권총을 쥐어 잡는다. 방아쇠가 당겨지고 총알이 발사된다. 뫼르소는 땀과 태양을 떨쳐 내고, 자신이 하루의 균형과 해변의 고요를 깨뜨렸다고 자각한다. 그리고, ‘그래서이미 쓰러진 아랍인의 몸에 총 네 발을 더 쏜다.

 

이 장면에서 피살자인 아랍인은 샘터에 누워 있었고, 아랍인에게 다가간 것은 오히려 뫼르소이다. 아랍인은 칼을 빼들긴 했지만 여전히 누운 채다. 칼을 들고 덤빈 것도 아니고 싸울 태세를 취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뫼르소가 칼에 위협을 당해서 자기 방어를 위해 총을 쐈다는, ‘정당방위주장은 법적으로 전혀 성립할 수 없다.

(장정일은 2014년 시사인에 실은 칼럼 이방인에 대한 현장검증에서 이를 이렇게 꼬집었다.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가 정당방위였다고 말하는 무지한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살인이 일어난 곳이 폐쇄되어 있지 않았고, 뫼르소가 도피 능력을 박탈당한 것도 아니며, 뫼르소가 권총을 연속 발사한 것은 과잉 방어였다는 점을 상기시켜야 한다. 아랍인은 바위 그늘 속에 비스듬히 누워 뫼르소에게 단도를 겨누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호사도 정당방위라는 논리로는 한번도 뫼르소를 변호하지 않았다.”)

 

번역의 정석안에서 언급된 조나단 마서(Jonathan Masur)의 논문 이방인에서 사전 계획성과 책임(Premeditation and Responsibility in The Stranger), 뫼르소의 변호사가 검토할 만한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서 정당방위 변론을 거론하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마서 교수는 “But self-defense was no real option.”이라고 단정한다. 아랍인이 누워 있었고, 뫼르소와 아랍인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며, 진지하거나 즉각적인 위험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뫼르소의 심리 면에서는 어떤가? 법적으로 정당방위를 인정받지는 못하더라도, 뫼르소는 동기 면에서, 그 아랍인이 칼을 빼들어서 위협을 느끼고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총을 쏜 것인가? 그러나 이방인은 뫼르소가 서술자인 1인칭 소설이다. 이 장면에서 뫼르소는 아랍인이 자기를 공격할까 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뫼르소 스스로도 자기가 돌아가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양에 떠밀리듯 나아가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뫼르소는 태양과 더위에 고통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랍인의 칼에 반사되어 이마와 눈을 찌르는 햇빛에도 고통을 느낀다.

 

만약 그 아랍인이 뫼르소에게 무언가 공격을 한 게 있다면, 차라리 그 뜨겁고 빛나는 태양의 빛을 뫼르소를 향해 반사시킨 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장면에서 아랍인은 뫼르소가 태양을 피해 그늘과 샘터로 가는 것을 가로막는 존재이자 그늘 쪽에서 뫼르소에게 햇빛을 쏘아보내는 존재로서 상징적인 위치에 있지, 뫼르소를 칼로 공격하려고 하는 실제적 위협이라고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확실히 하자. 이정서는 오역 때문에’, 뫼르소가 총을 쏜 게 정당방위였는데, 한국인들은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언어권의 비평가들 역시 이방인을 해석하며 뫼르소의 살인이 정당방위였다고 보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프랑스 카뮈 연구회 회장이 2014년 관련 문의에 대해 보낸 답장이다.


1) 만약 뫼르소 바깥에서 생각해본다면, 아랍인이 칼을 빼들었으므로 정당방위였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런 정황이 고려된다면 사형이 선고되지 않았겠지요. (식민지 알제리 상황에선, 유럽인은 절대 칼로 무장한 아랍인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지 않을 것입니다.)

2) 하지만,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을 볼 때, 카뮈는 우리가 뫼르소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 따른다면, 뫼르소로 하여금 권총 방아쇠를 무의식적으로 당기게 만든 원인은 단검에 의해 반사된 눈부신 햇빛이 맞습니다. 뫼르소는 해변가의 내리쬐는 더위에서 위협감을 느꼈으니, 태양 때문에 위협을 느낀 것이 맞습니다. 그가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은, 그러므로 타당합니다. 카뮈는 독자들이 뫼르소를 죄인으로 여기길 바란 것입니다. 설령 뫼르소에게 책임이 없다고 할지라도. 더구나 뫼르소도 죄의식을 느낍니다(“나는 내가 그날의 균형을 파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그는 불행의 문을 두드립니다. 직접성의 결백함에 머무르고자 했던 그는, 자신이 불행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압니다.

3) 당연히도 이 살인 사건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방인>은 철학적 우화이기 때문입니다(리얼리즘 소설이 아닙니다). 태양은, 고대 비극에서 그랬듯이, 운명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상황이 역전됨에 따라 책임이 없음에도 죄인이 되는 이 비극적 처지에 몰릴 수 있습니다(오이디푸스가 바로 그런 처지였습니다).

4) 또한 이 장면을 통해, 내재된 폭력이 언제든 살인으로 귀결될 수 있는 식민지 상황이 치환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안락한 공간(알제리 전체를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는 그늘진 샘가)을 두고 대결이 벌어지지요.

- 아그네스 스피켈(Agnès Spiquel)

(출처 : http://indindi.egloos.com/9001556)

 

성실한 독해자라면, 이 글의 내용이, 뫼르소의 살인을 정당방위로 해석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미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당방위인지 여부가 이방인해석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지 않았던 것은, 이것이 상당히 명료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뫼르소 자신의 서술에서도 그렇고 법정 진술에서도 그렇고 뫼르소는 자기가 그 아랍인에게 위협을 느껴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총을 쐈다고 한번도 말하거나 서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정서가 뫼르소의 살인을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방인텍스트 자체라기보다는, 작품을 이해하는 방식과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당방위 문제에 관련해서 맥락을 조금 더 보기를 원하는 분은 이 링크를 참고하라. http://indindi.egloos.com/7139646 )

 

 

2. 카뮈의 부조리개념과 이방인독해

 

그렇다면, 뫼르소의 살인은 왜 일어났으며,이방인》에 담긴 부조리의 주제의식은 무엇인가? 이정서는 이방인이 부조리 소설인 이유가, 뫼르소의 발포는 정당방위였지만 법정에서 유죄와 사형 판결을 받게 되고, 무고한 사람이 죽게 되었으니, 그렇게 법과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 때문에 이정서는 뫼르소의 살인이 정당방위여야 한다고(또는 정당한 것, 무죄여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카뮈의 부조리 개념은 그보다 더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주제로 소설 이방인, 에세이 시지프 신화, 희곡 칼리굴라를 비슷한 시기에 함께 썼다. 그러므로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해하기 위해 시지프 신화를 참조해 보자.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하나라고 말한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 의미, 가치를 찾는다. 세계 속에서 세계와 하나가 되어 습관적으로 살던인간은 어느 순간 ?’라고 묻는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세계는 왜 존재하는가. 하지만 세계는 비합리적이고 무의미하기에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한다. 그때 인간과 세계 사이의 절연’, 세계의 낯설음이 드러나는 것, 인간이 스스로 이방인이 되었음을 느끼는 것이 부조리를 인식하고 느끼는 것이다.

 

부조리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카뮈는 내세에 대한 희망으로 도피하는 것도, 자살하는 것도 모두 답이 아니라고 한다. 오직 부조리를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 버티는 것’, ‘부조리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카뮈가 제시하는 답이다. 자신이 하는 일의 무의미함을 직시하고 의식하면서도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나가는 시지프처럼, 부조리를 명철하게 직시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 귀결은 반항, 자유, 열정이다. 인간은 기꺼이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에 대해 긍정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수행한다. “부조리의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다.

 

이러한 카뮈의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이방인으로 돌아가보자. 이방인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조리도 이러한 인간과 세계 사이의 근원적인 부조리일 것이다. 아그네스 스피켈의 해석과 같이, '태양'은 운명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고, 합리성 없이 침묵하는 세계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세계의 낯설음을 낱낱이 드러내는 빛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뫼르소의 법정 진술처럼, 뫼르소가 아랍인과 그 샘터에서 마주친 것도 그때 뫼르소가 레몽의 권총을 갖고 있던 것도 우연이었다. 살인 장면에서 뫼르소가 첫 번째 발포를 하는 장면도 모호하게 적혀 있다. '태양 때문에' 뫼르소의 온 몸이 긴장했고, 손으로 총을 쥐어 잡았고, 그 결과 방아쇠가 당겨졌다는 식으로 서술된다. "내가 총을 쐈다"는 식이 아니라. (그래서 혹자는 손이 경련해서 실수로 총알이 나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Jj-gLuScT8) 뫼르소가 말한 '태양 때문'이었다는 진술은, 뫼르소가 혼자 걷게 된 경위, 샘터와 그늘을 찾아가려 한 이유, 돌아서지 않고 다가간 과정, 첫 번째 총알이 발사된 것 등을 포괄하는 말이다. 그리고 더 넓게는, 아랍인을 죽이는 데 이르기까지의 부조리한 사건의 연쇄(a chain of absurd events : 스웨덴 한림원의 표현) 자체를 가리킬 것이다.

 

이렇게 합리적 이유 없이, 어쩌면 개인의 자유의지도 의도도 불분명하게, 총알 한 발이 뫼르소의 총에서 그 아랍인에게 발사되었다. 그러고 나서 뫼르소의 의식이 깨어난다. 땀과 태양을 떨쳐내고, 자신이 균형과 고요를 깼음을 자각한다. 잠시 생각한 후, “그래서네 발을 더 쏜다. ‘부조리의 인간으로서, 자신이 직면한 부조리를 직시하고 긍정하고 짊어지며, 스스로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2부에서도 뫼르소는 자기가 이런 처지가 된 이유에 대해 따져묻지 않고 무덤덤하다. 그것이 "운명에 멸시로 응수"(시지프 신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왜 죽였는지 이유나 동기를 묻는 질문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오히려 한 발을 쏘고 난 뒤의 잠시의 시간, 그리고 그 뒤에 뫼르소가 다시 쏜 행위, 나아가 그 모든 상황에 뫼르소가 대처하는 태도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물론, 2부 재판 과정을 비롯하여 법률, 사회 시스템은 부조리의 일부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소송》 등을 쓴) 프란츠 카프카를 부록으로 비중 있게 언급하기도 했다. 이방인속에서 등장하는 법정 장면, 살인 사건임에도 피지배자에 속하는 피해자 측 증인은 등장하지도 않고, 오로지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했는지 뫼르소의 인간성이 어떠한지 등이 쟁점이 되는 모습,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의 모습 등은 답답하게도 보인다. 프랑스에 의해 식민지가 된 상태였던 알제리의 당시 현실도 이방인해석에서 간과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에서 부조리가 드러나는 방식을 두 가지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카프카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듯이, 인간에게 무관심하고 비합리적인 체계로서 법과 사회의 질서다. 이는 세부적으로는 식민 지배라든지, 폭력이 의미도 정당성도 압살해 버리는 현실 세계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비합리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의미 부여하려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작중에서 검사도, 판사도, 변호사도 뫼르소의 행동이나 사건에 대해서 계속 합리적 설명을 하려고 하거나 뫼르소가 살인을 뉘우치고 종교를 믿게 하려고 하거나 다른 변명을 하게 하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해야 마땅하다는 믿음, 관습적인 도덕을 밀어붙인다. 이는 마치 '죽음'이라는 삶의 근본적 한계를, 자식은 마땅히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해야 한다는 관습과 도덕을 과장되게 연출하며 덮어 가리려는 듯하다. 사형수가 된 뫼르소에게 신을 믿으라고 설득하는 가톨릭 신부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이때 그들과 대립하는 뫼르소는 마치 비합리적이고 무관심한 세계와도 비슷해 보이곤 한다. (이방인마지막 부분에서 뫼르소는 세계가 자신과 이토록 닮았고 형제와 같다는 데서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뫼르소는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나는 마땅히 견지해야 한다.”(시지프 신화)라고 믿는 듯이,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대로만 진술한다. 뫼르소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 말하려 한 것이 가치 있는 이유는 무슨 정직성이나 솔직성 때문이 아니다. 이 세계와 인간 사이에 빚어지는 부조리를 회피하거나 덮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전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이 단락은 나의 이방인에 대한 개인적 비평이고 해석일 뿐이다. 다만 이와 유사한 방향에서 카뮈의 철학이나 시지프 신화와 연결해서 이방인을 해석하고 주제의식을 이해하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시지프 신화에는, ‘이방인’, ‘휴지’, ‘무관심’, ‘습관’, ‘깨어 있는 의식’, ‘진실이방인에 직접 적용되는 개념과 상황들이 언급되고 있기에 자연스러운 일이다.) 카뮈 철학을 바탕으로 이 이야기를 해석하려는 것이, 적어도 뫼르소의 살인이 정당방위라는 설보다는 일반적일 것이다.


이정서의 주장은, 이러한 카뮈의 철학에 대한 이해나 음미보다도, 자신이 생각하는 부조리의 틀을 더 우선하려는 듯한 느낌이다. 이정서가 이방인》에 대한 그러한 자기 해석을 제시하기만 했다면 별 문제가 안 됐을지 모르나, 이정서가 마치 '정당방위' 해석이나 이정서식 부조리 개념이 이방인》 해석에서 주류이고 절대적으로 옳은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상당한 문제이다.


그 밖에도, 인종주의나 식민주의에 관련된 문제 등 이방인과 특히 살인 장면을 해석하고 비평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다. 이는 이방인자체가 아그네스 스피켈의 말처럼 철학적 우화이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풍부한 철학적 역사적 해석을 공부해보는 것이 이방인독서의 중요한 즐거움이라 할 터이다. 근거도 빈약한, ‘뫼르소의 살인은 정당방위이고 그걸 유죄 판결한 재판이 부조리한 것이란 해석이 정설인 것처럼 광고를 하다니, 이 무슨 이방인》에 찬물 끼얹는 소리란 말인가.

 

 

3. 번역자가 원문을 있는 그대로 옮긴다고?

 

여담으로, 그래도 번역의 정석에 남기는 리뷰이니,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해 보자.

 

이정서의 번역에 대한 주장은 단순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실상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저자가 쓴 원문 텍스트가 존재하며, 원문 텍스트는 저자의 뜻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번역자는 원문 텍스트를 되도록 그대로 옮겨야 하며, 그것이 저자의 뜻을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지당한 말씀 같지만 문제가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텍스트를 독해하는 행위 자체가 저자의 뜻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는데, 번역자가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따라 번역도 달라지는 것이다. A라는 문장을 ㄱ이라고 이해했다면 ㄱ에 맞춰서 번역을 할 것이고 ㄴ이라고 이해했다면 ㄴ에 맞춰 번역을 할 테니까. “번역은 텍스트에서 출발하지만 텍스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한다.”(박산호·노승영(2018),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세종서적) 이 때문에 이정서는 원문 텍스트를 최대한 살리며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자신의 이해가 저자(지금까지 전적으로는 카뮈, 생텍쥐페리, 피츠제럴드, 헤밍웨이...)의 원래 의도에 가장 가깝다고, 아니 저자의 원래 의도임이 틀림없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이정서의 해석이 저자의 의도와 일치하리라 보증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이정서가 이야기하는 것은 또 하나, 원문을 되도록 그대로, 문장 구조나 문장부호나 단어 구성 등을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원문 텍스트야말로 저자의 의도를 가장 잘 담은 완결된 존재이고, 번역은 이를 모방하여 최대한 보존하는 작업이라는 믿음을 반영한 듯하다. 물론 번안 작업이 아닌 이상 원문의 표현 방식이나 내용은 많은 부분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애초에 언어 체계가 다르고 독해 환경이 다른데, 텍스트 자체에만 집중해서 텍스트 대 텍스트로 원문의 형식을 보존하는 것이 곧 뜻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때로는 번역가가 원문 자체에만 갇혀 있는 것이 꼭 바람직한 게 아닐 수도 있다.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를 살펴야 할 때도 있다. 텍스트 독해 자체가 열려 있는 것이고 번역 작업 자체가 다양성과 새로움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입장도 가능하다. “번역에도 하나의 답이 있다는 이정서의 호기로운 번역론과는 달리 말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번역학에서 다루어볼 일종의 철학적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번역가들이 번역에 대한 에세이 등을 내면서 고민을 풀어놓기도 한 주제들이다. 이정서가 이러한 연구나 책들을 읽어보면 좋겠다. 적어도 자신의 해석이 곧 저자의 의도와 일치한다는 믿음을 섣불리 가지고 역설하기 전에 말이다.

 

도움이 되길 바라며, 번역가 정영목의 최근 책에서, 번역이 완결된 원문 텍스트의 의미를 그대로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라는 믿음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한 대목을 소개한다.

 

언어는 성긴 것이고, 그 빈 부분은 읽는 사람이 상상력으로 채워넣어야 한다. 사실 이 자체가 특별한 발상은 아니고, 실제로 문학 텍스트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바이지만, 번역으로 들어오면 이 사실을 자주 잊곤 한다. 즉 이미 모든 게 주어져 있다는 사고, 원문 텍스트는 완결되고 고정된 실체라고 가정하는 사고, 그 안에 고정되어 있는 의미를 건져서 다른 언어의 외피를 씌우겠다는 사고가 들어서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번역을 둘러싼 모든 기계적 발상, 또 기계번역의 토대가 되는 발상이다. 반대로 텍스트가 열려 있을 뿐 아니라 그 기초에는 언어의 불완전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번역 언어가 그 불완전성을 그 나름으로 보완하면서 원래의 언어와 더불어 새로운 언어로 나아간다는 베냐민 같은 발상이 있고, 그런 발상에서 새로운 시야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다른 자리에서도 한 적이 있다.” (정영목(2018),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99-100)

 

만일 번역하는 인간이 투명한 유리가 된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일, 환상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언어라는 것이 애초에 투명한 유리가 아니라, 혼자 서 있으면서 동시에 뭔가를 희미하게 비추는 흐린 거울 같은 것이라면? 사실 같은 원문이라도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번역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곡과 때처럼 보이는 것은 흠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모습, 즉 모양과 색깔이 서로 다른 것일 뿐 엄연히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성하고 속죄할 것이 아니라, 그 다양성을 즐기고 누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정영목(2018),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119)

 

 

4. 인정하는 미덕을 기대하며

 

끝으로, “이정서 씨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명백히 드러난 마당이다.”라는 출판사 책 소개 중의 내용이 근거가 부족하며 실제는 정반대에 가까움을 지적하고자 한다.


2014년 논쟁 당시 온라인상에서도 이정서의 이방인 해석 등은 대부분 논파된 바 있으며, (참고 : indindi.egloos.com) 불문학계 정식 논문을 통해서도 이정서의 소위 번역 비판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님이 논증되었다. 다음은 2015, 불어불문학연구에 실린 김진하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한국어 번역본들에 대한 문체론적 고찰에서 이정서의 번역본 및 번역 비평 그리고 해석의 문제점을 집약하여 논한 대목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정서의 이방인번역에서뿐만 아니라 기존 번역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드러낸 독단과 자기현시욕, 그리고 작품에 대한 몰이해가 대중과 프랑스어 학습자들을 호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정서는 작품에 대한 과도한 애정으로 말미암아 작품을 자기 나름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런 시각이 작품을 얼마나 자기만의 견해로 오해하게 만드는지는 22장에서 뫼르소가 감옥에 갇힌 뒤에 결코 언급하고 싶지 않은 일들에 대해 언급한 것을 해석할 때이다. 이정서는 뫼르소가 차마 언급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들이 소설에 드러나지 않고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써, 그것은 검사가 마리를 회유한 내용이라고 유추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23장의 증인 심문 과정에서 마리의 증언이 능란한 검사의 수사법에 의해 호도되는 상황에서 마리가 보인 반응을 두고 억지 해석을 가져다 붙이고 있다. 이 부분의 오독과 억지 해석에 대해서는 차마 언급하기 민망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오독 때문에 이정서는 김화영의 번역을 두고 역자는 이방인에 등장하는 인물들 전부를 자기 입맛에 맞게 창작해 놓고 있는 것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목의 해석은 무슨 심오한 작품 해석의 수준에서 갈리는 의견차가 아니라 작품의 문장들을 표면적으로 읽어나갈 때 생기는 이해의 차원이다. 사실 22장에서 뫼르소가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까닭은 그 부분이 조금 암시적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사실 그것은 다른 장의 내용을 통해 꿰맞추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의 어조에 대한 감지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감지하려면 김예령의 번역을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요컨대, 소설 작품에 대한 몰이해는 새로운 소설쓰기가 되어 버림을 이정서의 독법은 보여주고 있다.”

 

 


추석 연휴를 맞이하여 조금 시간이 나기에 긴 글을 작성해봤다.


이정서와 새움 출판사가 전향적인 자세로, 잘못된 점이나 모자란 점을 인정하는 미덕을 보여주기를, 그래도 한 번 더 기대해본다. 그리고 다른 독자들이 《이방인》에 대해, 이 책의 광고 때문에, 자기들이 지금까지 '오역 탓에' 잘못 안 줄 착각하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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