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깊이 문학동네 시인선 62
김선태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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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본 듯 했다. 그의 전작 <<살구꽃이 돌아왔다>>에 실린 <산벚꽃>에서 '까치 똥에서 태어났으니 / 저 손들 차례로 이어보면 / 까치의 길이 다 드러나겠다'처럼 <<그늘의 깊이>>를 읽다 보니 그의 내면의 길이 다 보였다. 시인은 이토록 순수했다. <육자배기>의 절창이 거기에 있었다. 
 
"가난이라는 그늘이 싫어 필사적으로 아버지라는 철조망을 뚫고 달아났네......폭력이라는 그늘을 되밟지 않으려 아버지라는 권위를 자진 철회하고 싶었네" 화자는 가난한 집을 떠난 아들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법이자 권위, 사회 제도의 상징이다. 폭력을 휘두른 권위는 화자가 바라는대로 쉽사리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만인이 만들어준 권위가 아닌 폭력을 통해 획득한 권위는 "가난이나 슬픔이나 원망의 그늘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네 / 되려, 오래된 그늘에 새로운 그늘을 새끼 치며 무섭게 뻗어나가고 있었네"처럼 오히려 더 강하고 질기게 새로운 그늘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화자는 "오랜 삭임 끝에야 드리운다는 말갛고도 흰 그늘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네"라고 말하지만 시인은 그 "흰 그늘"을 바라고 있다. 우리도 그 날이 오기를 바란다. 
 
서문에서 시인은 "현대라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내 시는 끝까지 문명의 반대편에 설 것이다. 오래된 미래를 살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문명의 이기에 물들어버릴 대로 물들어버린 나에게 일침을 가한 듯했다. 세상을 향한 시인의 일침을 결코 흘려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젠가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난다. "마을에 사람이 죽으면 도깨비 불이 이쪽에서 휙, 저쪽에서 휙하고 춤을 췄어"라고 말하면 그냥 지어낸 이야기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어떤 설화>의 "십 리 밖에서도 망자의 살냄새를 알아보는 여시와 밤이면 퍼런 손전등을 두 개나 켜들고 찾아오는 부엉이를 모두들 저승사자라 불렀다 / 마을에 전등이 켜지면서 저승사자들은 오지 않았고 망자들은 길동무를 잃었다"는 말에 소름이 끼쳤다. 무섭거나 징그러움의 소름이 아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여시와 부엉이가 망자의 죽음을 알아주고 망자의 길동무가 되어 준다니 얼마나 든든한가. 시인은 오래된 것에서 따뜻함을 본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였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문명의 사람이 자연의 품 속에 있었던 태고적 그리움을 승화시킨 시가 2부에 나오는 <<섬의 리비도>> 연작시로 보여진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김선태 시인의 '섬' 내부도 탐색해서 올리겠다.
 
나름대로 해설가의 흉내도 내 보았다. 시의 언어는 한 가지 언어가 아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시가 훌륭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책 말미에 실린 김경복 교수의 해설도 그 분량이나 내용이 가볍지 않다. 마치 시인의 몸 안에 들어갔다 나온 듯하다. 문학평론가의 해설과 자신의 해설을 비교해 보면 시 읽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어머니 묘소에 큰절하고 비석 뒷면을 살펴보니
생몰년월일 앞에 한자로 生과 卒이 새겨져 있다
생은 그렇다 치고 왜 死가 아닌 卒일까 궁금해하다
인생이 배움의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이승이라는 학교에 입학하여
인생이라는 기나긴 배움의 길에 오른다
하지만 우여곡절과 신산고초의 과정 속에서
희, 로, 애, 락, 애, 오, 욕까지를 제대로 익히고
무사히 졸업을 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는 못 견디고 너무 일찍 자퇴하거나
어떤 이는 병이 들어 중도에 휴학을 하며
어떤 이는 불성실하여 퇴학당하기도 한다

그러니 내 어머니는 그냥 사망하신 게 아니다
여든 해 동안 인생의 전 과목을 두루 이수하시고
이승이라는 파란만장의 학교를 졸업하신 것이다
저승이라는 또다른 배움의 과정에 드신 것이다
무덤 옆의 저 비석은 자랑스러운 졸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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