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 제자도
존 하워드 요더 지음, 존 C. 누겐트.앤디 알렉시스-베이커.브랜슨 L. 팔러 엮음, 홍병 / 죠이선교회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불편해진다. 색깔부터 빨간색이다(종이 커버를 배끼면...^^). 영어 원제가 “Radical Christian Discipleship”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자도가 얼마나 급진적인지를 말하는 책이다. 존 하워드 요더의 설교와 아티클을 모아서 제자도라는 제목으로 엮은 책이다. 존 요더의 사상이 얼마나 예리하고 폭이 넓으며 구체적인지를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불편한지도 모르겠다. 바른 이야기인데도 성경에서 그 논증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우리가 이미 익숙한 기독교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하나 하나 조목 조목 일러줄 때는 그 불편함에 대해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되지?” 혹은 “알고 있지~! 그런데 어떤 대안이 있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부분에까지도 답을 제시한다. 그 답이 때로는 너무 이상적이다, 원론적이다 말할지 모르지만 부인하기 어려운 맞는 말이다. 그러해서 자연스러운 반응이 속이 더부룩해진다. 소화가 잘 안되는 것이다. 이게 맞는데 내 삶은 뭐지? 여러가지로 더부룩한 부분이 많으나 크게 두 부분만을 언급하자면 이렇다. 첫번째는 세상에서의 불순응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에 순응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서론에서 제시하듯 “우리의 사명은 세상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비슷해지는 것이다.”(22쪽),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열쇠가 바로 불순응이 아니라 순응이라는 것”이다.(28쪽) 이 순응은 우리가 익숙한 미지근함이라는 순응주의를 타파하고 불편하고 불안정한 하나님께로의 의탁으로 나아가도록 한다. 이는 경제와 국가정치에 있어서까지도 해당된다. 돈에 대한 부분까지 세세하고 폭넓게 다루는 부분은 예리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내 마음에는 생채기를 낸다. “베풂이 우리의 생활 법칙이라면, 그리스도인은 남을 섬기지 못할 때마다, 일을 해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저 주지 못할 때마다 이웃의 것을 훔치고 있는 셈이다.”(148쪽), “만일 재정적인 안정이나 이자율이 노동자의 학대, 불법이나 투기, 혹은 전쟁 물자나 사치품의 생산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착한” 투자도 피해야 한다.”(157쪽) 그렇다. 그렇게 복음은 예리한 것이다. 저자는 그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라고 결론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이겼으나 그 승리가 밟는 길-그것이 확실해진 날부터 그것이 명백히 드러날 날까지-은 십자가의 길다.”(238쪽) 두번째는 사랑의 전략과 두려움의 전략은 다르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신앙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부모의 결정으로 침례를 결정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두려움의 전략이며, 젊은이에게는 익숙함에 젖도록 하는 순응주의를 강요하는 것이 된다. “사랑의 전략은 성령의 사역과 진정한 제자도의 매력을 충분히 신뢰한다. 그래서 침례의 의미를 아는 성인의 유도를 받지 않은 채 스스로 침례를 요청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이 태도는 "젊은이들이 교회에 머물기보다 교회를 떠나는 것을 더 쉽게 만들어 준다"는 책망에 열려 있는 데 반하여, 이 사랑의 전략이 아예 그 목적과 함께 시작하는 두려움의 전략보다 더 잘 작동할 확률이 높다.”(221쪽) 이 불편함은 복음에의 온전한 헌신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이 헌신조차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헌신이어야 한다.

 

  속이 시원해진다. 현실과 관련하여 "할 수 없죠!"라는 변명을 없애준다. 복음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떠해야하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래서 속이 시원하다. 그렇다. 내가 따르는 길은 이 길이다. 그로인해 새 열정이 생긴다. 이 열정은 나 자신이 가진다고 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일에 근거를 둔 열정이다. “우리는 평화를 거의 성취할 수 없는 과업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이미 얻은 승리에 뿌리를 두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주님이란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반영할 진리다.”(211쪽) 자아실현과 자아성취를 강조하는 세상 가운데 우리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 목적의 인식”(40쪽)만 가지면 된다. 그래서 “나 자신을 뛰어 넘고(내 인생의 기준으로 삼는) 자아실현을 대체하는, 어느 나라에 헌신하는 일이 가능하려면 신약 성경이 "교회"(communion)라 부르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 요건은 하나님이 나에게 위임하신 목적들, 즉 나 자신을 뛰어넘는 목적들에 헌신한 일단의 사람들이다. 이를 우리는 교회라고 부른다.”(41쪽)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러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법을 배우려면 결코 완수될 수 없는 영적인 기어 변속이 필요하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정의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과정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정의상, 자기를 감추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사판을 일컫는다.”(103쪽)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짓이 있으면 다른 이들을 멀리하는 가운데 본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지만 정직하겠다는 다짐은 모든 방어 수단을 포기한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112쪽), 또한 “세상에서 부적응자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삶, 불순응, 그리고 "더 큰 의로움"은 다름 아니라 교회의 하나님과 나누는 살아있는 교제다.”(136쪽) 그래서 이 열정 안에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소망으로 가득해진다.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152쪽)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메시지를 선포하며 살도록 이끈다. “우리의 기독교적 불순응의 궁극적인 척도가 있다. 불순응은 소망에 근거를 두고 있고, 소망은 세상에 선포할 하나의 메시지다.”(165쪽) 이러한  삶으로의 소망으로 인해 새 열정이 생긴다. 그러한 열정을 삶으로 담아내는 것은 현실에서의 나의 숙제이다. 그 길은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는 현실 세계의 현실 생활에 새로운 패턴을 초래한다. 이 새로운 패턴은 내세 지향적이거나 반세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이 관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이 적을 사랑하기 원하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범법자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너희도 이 세상에서 그런 자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떡을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분은 "하나님이 당신의 떡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나누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위계 제도를 지키고 싶은 세상에서 그분은 "노예는 그 주인의 형제이고, 여성은 남성과 똑같은 위엄을 갖고 있으므로 위계 제도를 뒤집어엎어라"고 말씀하신다. 맨 윗사람이 결정을 내리게끔 되어 있는 세상에서 그분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 때문에 다 함께 결정을 내려라"고 말씀하신다. 종교와 정치 모두 강제력을 행사하는 세상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본성은 당신을 강제로 끌어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모여라"고 말씀하신다. 대다수 사람이 큰 어려움 없이 법을 통과하기 위해 법을 재정의하려고 애쓰는 세상에서 그분은 "하나님께서 법을 성취할 능력을 당신에게 주실 것인즉 법을 성취하라. 내가 곧 율법의 성취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의 참신한 면모는 새로운 문화에 있다.”(199쪽) 빨간 책 표지가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원론적이면서 급진적인 제자도는 내게 허락하신 제자의 길이 얼마나 멋있는 삶인지를 설득한다. 불을 붙여 부채질하며 나로 하여금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도록 획책(?)한다. 미지근한 기독교 내에서 열정적으로 살도록 견인한다. 위험한 책이다. ^^ 빨간책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존 요더에 사로잡혔다. <예수의 정치학>을 새로이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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