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프라우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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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쥘 드 고티에(Jules de Gautier)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인 [마담 보바리]의 여주인공이었던 엠마 보바리의 성격을 보바리즘이라 규정한 바 있다. 보바리즘은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현재의 자신에서 벗어나 미래를 이상화하는, 이른바 과거의 추억, 미래에 대한 꿈이 현실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에 불만을 가진 나머지 현실을 도피하는 증상으로 간략히 살펴볼 수 있겠다.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장편소설 [하우스프라우(Hausfrau)]는 고티에가 규정했던 보바리즘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하우스프라우]는 가정주부, 즉 한 유부녀를 주인공으로 삼아 전개되고 있다. 주인공 안나는 음울하고 우울한 가정주부이다. 현실에 부딪히며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의 사랑에 아쉬운 듯 미련이 남아있었고, 괴로운 현실에 대해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나가 선택한 방식들은 미시적으로 보자면 다른 부분은 있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보바리즘적 요소를 담아내고 있다.

안나는 스위스인 브루노와 결혼한 유부녀이다. 미국에서 살다가 스위스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안나는 현재의 삶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시어머니 우르줄라는 안나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대한다는 느낌이 없다. 단지 후손을 낳아 주는 도구, 아들을 위한 존재, 단순한 가정주부로서의 역할로만 대할 뿐이다.


안나를 낯선 대상으로만 대했다. 당신 아들의 행복을 이뤄 주는 도구.


안나는 한 여성으로서 주체성을 얻지 못했다. 심지어 거주하는 스위스는 독일어를 사용한다. 그것도 원() 독일어가 아닌 스위스화()된 독일어, 즉 슈비처뒤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독일어는 할 수 있는 안나였지만 슈비처뒤치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안나는 스위스에서도 소외를 당한다.


모든 단어가 시볼레스이기 때문이다. 안나는 슈비처뒤치는 전혀 하지 못했다.


안나는 주체성을 가지지 못하고 생활하고 있으며, 살고 있는 공간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동떨어져 있는 존재이다. 외톨이이다 보니 안나는 그 무엇도 스스로 할 수 없게 되었다. 무력해졌고,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타인이 주도를 하게 되면 자신은 책임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그녀의 욕망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자기 대신 브루노가 결정을 내리게 놓아둠으로써, 자신은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따르기만 했다.


안나는 이러한 자신의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다.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거지.


나는 나의 모든 경련의 통합이야.


안나는 살아 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의미로서 살아 있을 뿐, 생의 의미는 그녀에게 없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안나에게 있어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과제인 것이다.

안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방법을 선택한다.

1) 정신분석 상담

2) 독일어 수업

3) 간통

꾸준한 정신분석 상담을 통하여 안나는 우울증을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책의 말미에 가는 동안에도 그 효과는 미미하다.

독일어 수업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독일어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나가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에 있어서 안나는 이방인이다. 이미 타자(他者)로서 스위스인의 영역에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안나는 그 영역의 경계를 깨고 소속되기 위한 시도였을 것이다. 독일어 수업은 다시 말하면 사회적으로 소외된 안나의 현 주소를 상징한다.

이 소설의 가장 핵심이자 비극적인 부분은 바로 간통일 것이다. 이 작품은 성 묘사가 수위 높게 묘사되고 있는데, 피상적인 독서를 하였다면 단지 선정적인 소설이라고 일축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감한 성 묘사는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안나는 소외되어 있고, 수동적인 인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스스로 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무언가도 스스로 원하는 것을 망설일 수밖에 없다.


원해진다는 것에 대한 욕망. 그녀는 누군가에게 원해지고 싶었다.


그러던 그녀는 스티븐이라고 하는 남자를 만났다. 그녀는 스티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고 정을 통하게 된다. 애정의 대상이 된 남자와의 성적인 행위를 통해서 안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이 떠나고 난 뒤 그녀는 낙담에 빠진다. 이 점에서 안나가 간통을 하는 이유를 추정할 수 있다. 스티븐과의 관계에서 안나는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안나는 정신분석 상담과 독일어 수업에도 꾸준히 참여하지만 상담에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고, 독일어 수업에서는 언어의 미묘한 차이를 통하여 자신과 사회의 거리감이 두드러지는 효과만을 얻게 된다. 독일어 수업에서 알게 되었던 아치, 그리고 지인인 카를 등, 많은 남성과 성관계를 가지는 이유는 어찌 보면 안나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였다. 확실히 아치와 카를 등의 남성에게 스티븐처럼 애정을 느껴서 간통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우울과 소외, 절망, 무기력을 이겨 내기 위한 상담과 수업은 효과가 없었다.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고 감정은 통제가 어려웠다. 안나는 과거에 있었던 스티븐과의 관계에서 살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에 섹스야말로 안나의 유일한 해답이 될 터였다.


생존하기 위해 나는 자기 파괴적이다.


학대에 가까운 섹스를 통하여 안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려 한다. 소외를 통해 잃어버린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기 위한 처절한, 그리고 절박한 그녀의 몸부림이었다. 작품을 보면 안나는 섹스를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하여 안나는 조급하고 슬픔이 묻어 나온다.

그러나 안나의 간통이라는 수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안나 개인적으로 보자면 섹스라는 것은 몸의 물질적인 접촉을 통하여 살아 있음을 느끼려 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보편적 시각에서 간통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소설의 첫 문장은 이와 같다.


안나는 좋은 아내였다, 대체로.


좋은 아내인 것은 맞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것. , 이것은 나쁜 점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안나는 일반적으로 괜찮은 아내이지만 흠결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여기서의 안나의 흠결은 작품의 전체를 꿰뚫는 핵심이다. 이 문장은 안나를 좋은 아내로 평가하는 문장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시각에서 안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나의 우울증을 흠결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아쉬움이 있다. 보편적인 시선에서 안나의 흠결은 우울증과 소외가 아니라 바로 간통이 된다. 남편인 브루노의 시선으로도 우울증보다 간통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 안나의 우울증에는 물론 걱정하는 모습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간통에 있어서는 폭력을 휘둘렀으며 안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집에서 내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관점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문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의 가정은 보편적인 시선에 의하면 안나의 간통으로 인해 불행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답이 될까. 잘못이 있다면 누구의 잘못일까.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안나를 소외시켰던 사람들? 물론 그럴 수 있다. 아니면, 간통을 저질러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되는 안나?

이 작품은 안나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묘사되는 안나의 내면에 몰입을 하게 되면서 안나를 동정하게 되고 안타깝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내면이 묘사되는 만큼 독자들은 오히려 의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정답일까? 하는 의문 말이다. 안나를 보면 슬프고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안나의 수단은 이른바 방법론적으로 잘못되었다. 안나 개인적인 관점에서 안나의 선택은 필수불가결한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보편타당적인 가치관으로는 안 좋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핵심 테마는 간통이 아니다. 간통은 소설의 소재로써 쓰였을 따름이다.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라고 하는 자기(自己)를 찾기 위한 절박함, 소외가 핵심이다. 이 점에 염두를 둔다면, ‘오죽하면 안나가 그런 선택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유가 여기에서 그친다면 단지 간통의 정당성을 두고 따지는 논쟁에서만 그치게 된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안나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소외와 타자화란 무엇이며, 그 본질은 무엇인지에 담겨 있다. 안나라는 예민한 여성의 심리를 통하여 우리는 그 본질에 대하여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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