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에 관한 생각'을 읽는 동안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 '부서진 사월'이 생각났다. 부서진 사월은 눈에는 눈, 이에는이라는 알바니아 북부의 전통 관습 '카눈'을 대상으로 쓴 소설이다. 타인이 나의 가족을 죽이면 나는 상대의 가족을 죽여야 하는 것은 용기로 칭송받는 사회. 이를 의식이라 행하는 자는 일말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는다. 의식을 행하는 자가 중시하는 것은 절차이다. 상대의 가족을 살해하러 가는 자는 절대로 등을 보여선 안된다. 죽인 자는 머리를 바닥에 대게하고,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해야 한다. 의식을 행하는 자는 마지막 절차를 마친 순간 안도한다.
'부서진 사월'은 끝없는 복수를 통해 이어지는 인간의 허무를 다루고 있지만, 그 룰과 제도를 정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 자신이다. 인간들은 본인들의 의지와 사상에 따라 상대를 죄인으로 만들고, 상대를 차별하고 탄압하거나 위계와 질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도덕과 윤리라 칭하는 것이 다른 어디에서는 다른 의미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차이에 관한 생각'은 영장류 및 동물의 생태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고정관념과 윤리, 도덕을 타파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책은 인간만이 그럴 것이라는 우월성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를 일깨운다. 인간만 공감하고 타인의 감정에 반응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오만이자 착각이다. 동물들 역시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겪는 상대를 위로한다. 강간 역시 동물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고, 동물들은 연대를 통해 위기를 극복한다. 여성 오랑우탄은 함께 모여 위험에 처한 다른 오랑우탄을 돕는다. 그리고 인간과 영장류 역시 이런 폭력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려면 여성의 사회적 연대 또는 친족 간의 연대, 또는 남성들끼리의 커뮤니티 형성이 매우 중요하게 이어져왔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지도층에 위치한 알파 남성과 여성 침팬지의 생태였다. 알파 침팬지들은 자신의 위치와 권위를 알고 있다. 침팬지는 그 힘을 사회의 화합, 질서 유지를 위해 사용한다. 침팬지는 본능적으로 조직이 안정적일 때 자신의 위치와 권위가 지켜질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를 알고 있는 지배자는 사랑과 공포 두 가지를 포용한다. 우리는 이를 잘 행하고 있는가? 집단이 유지되어야 자신의 지위도 인정받는다는 이 단순한 진리는 우리 사회에서 지켜지고 있는가? 어째서인지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다.
'차이에 관한 생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각 장에서 던지는 주제 모두가 흥미로웠다. 이렇게 재밌고 신선해도 되냐 싶을 정도로 568페이지의 꽤 두꺼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최근에 읽은 '위어드'보다 '우주 상상력 공장'보다 재밌는 것은 확실하다.(아... 두 책의 저자에게 죄송한 일이다.) 마치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재미와 감동이 공존한다. 동물의 생태는 인간과 닮아 있고, 그들의 삶은 환경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보다 현명하게 발전해 왔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사회 아래 우리가 잊고 있던 중요한 것들을 일깨운다. 어떤 상황에서 그들의 현명한 대처는 인간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동물보다 못한... 인간들도 상당수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동물들이 주는 중요한 가르침은 '공동체'다. 그 안에서의 화합과 연대는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다름을 인정한다. 인간은 선 긋기와 편견, 차별이 사회의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하고 이해하지 못하는가? 어째서 우리는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상대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는 많은 사건들, 정말 그것이 중요한 것일까?
'차이에 관한 생각'을 읽고 '위어드'를 떠올리니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고대 원시 사회로부터 이어져 온 사회의 발전과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발전이 인간 사회에 유익하기만 했는가? 잊어버리거나 중요한 것을 놓치지는 않았는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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