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와 함께 프란츠 파농 읽기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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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무지가 죄'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깨닫게 된다. 동시에 좋아하던 것과 아름답다 여기던 것의 이면을 알고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카뮈라는 작가를 존경한다. 그는 '시지프 신화'를 통해 어떤 철학자 보다 니체의 원형 회귀(아모르파티)를 설명한다. 그의 해설은 니체의 철학을 보다 세부적이고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만든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부조리를 얹는다. '까빌리의 비참'에서 그는 사회의 근간을 꿰뚫어 보는 시각을 가진 저널리스트였다. 그는 가난의 근간이 게으름에서 오지 않으며 그들이 더 많은 일을 하고 노동력을 착취 당한다고 기술한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교육과 자본의 재분배를 논한다.

그는 4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며, 다방면에서 지적인 멀티플레이어였다. 태양의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다 했던가. 식민지였던 고향 알제리와 흑인을 바라보는 카뮈의 시각.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머릿속의 카뮈와 너무 달라 당황하게 된다.

카뮈는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략했을 때, 알제리에 온 프랑스인을 '최초의 인간'이라 기술한다. 내용은 프랑스 침략을 정당화하는 내용이다. "언제나 시비 걸기를 좋아하는 냉혹한""적들"은 피지배인이었던 알제리 선주민이자 조선인을 지칭한다. 저자는 '최초의 인간'을 옮긴 번역가는 이 글을 감동적이라 찬양했다고 적는다. 알제리와 똑같이 식민지 시대를 겪었던 한국인이 다른 식민지를 옹호하는 글을 찬양한다? 이 지식과 행동의 오류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알제리에 카뮈의 흔적이 없음에 아쉬워하는 한국인 관광객, 알제리에 있는 카뮈의 묘비가 훼손된 것에 반달리즘이라는 평을 한 작가. '카뮈와 함께 프란츠 파농 읽기'에서 부끄러웠던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카뮈와 알제리를 대하는 우리의 시선과 태도이다.

꽤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으나 파농의 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좋은 하는 작가 중 한 명이 '토니 모리슨'이며 그녀가 쓴 보이지 않는 잉크를 추천할 정도로 애정 한다. 흑인 인권에 꽤 관심이 있다고 했으나, 그저 지적 허세였을 뿐인가. 책에 소개된 파농이란 작가의 소설은 마치 시와 같다. 아름답고 단아한 문장들은 하나같이 취향이라 더욱 아쉬웠다. 기회가 된다면 작가의 책을 꼭 읽겠다 다짐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프란츠 파농의 말

'카뮈와 함께 프란츠 파농 읽기'에서 마주한 파농은 다양한 철학 이론을 섭렵한 사상가처럼 느껴진다.

인종차별에 분노하며 투쟁을 시작한 그의 무기를 '이성'이라 적듯이, 그는 스스로를 엘리트라 자부한 의과대학생이며 지성인이었다. 그는 흑인과 백인이 유사함을 다양한 학문을 통해 확인했다. 흑인의 문제를 피부색이나 열등함으로 보기보단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적인 상황 안에서 이해했다. 백인에 의해 사회적으로 착취되고 노예화되며 멸시되고 있는 흑인의 상황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았다. 그는 테러리즘과 폭력에 반대했으며, 흑인의 정신세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억압받는 존재인 흑인이 능동적, 주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이었다. 그를 이해하는데 '작가'라는 단어는 너무나 작은 그릇 일 수 있다.

이 책에서 소개된 파농과 카뮈 그들의 자취에 박수를 치거나 모든 것을 긍정할 수는 없으나, 카뮈와 파농이라는 시대의 지성을 만났던 뜻 깊은 시간이었다. 저자 박홍규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채 그들의 가치관과 이상, 한계를 정밀하게 분석해내었고 이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이름을 확인하게 하는 책은 많지 않은데, 그 정도로 놀라운 책이었다. 오른쪽 상단에는 작은 글씨로 '언젠간 읽겠지'라고 적혀 있다. 이런 좋은 책이 이렇게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이 기회를 빌어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파농의 책과 더불어 읽을 책이 많아졌다.)

그것은 종결이 아니라 이행이고, 최종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카뮈와 파농의 1950년대, 흑인의 자기 긍정 중

파농이 쓴 '흑인 오르페'에 대한 사르트르의 평

ps. 또는 번외라고 해야 할까.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끈 사람은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다. 그는 카뮈와 파농 두 사람을 이해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선을 전달한다. 파농은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인물이다. '유대인 문제의 고찰을 통해' 사르트르가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삶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분석한 것을 파농은 흑인과 식민지 상황을 더하여 변증법적인 해결을 통해 극복하려 한다. 그는 식민지 상황에 대입하여 제3의 새로운 인간을 구상한다. 파농이 쓴 '흑인 오르페'를 본 사르트르는 흑인성을 백인성의 우월성에 대한 부정으로 설명하며 평한다. 사르트르의 평가를 읽은 파농은 '마지막 기회를 훔쳐 갔다 느낄 정도'라고 평하는데 이는 자신의 글을 정확히 파악한 사르트르에 대한 분함이 아니었을까.

불화, 그것은 더는 볼 수 없는 것에 비하면, 함께 살아가는 한 방법에 불과할 뿐 아무것도 아니다.

사르트르의 추도문

카뮈의 장례식 추도문 중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사르트르의 추도문이었다. 두 사람은 상대의 철학을 인정하지 않아 친구로 만나 서로 등을 돌린 적이 되었다. 카뮈는 사르트르의 문학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르트르는 카뮈의 문학을 인정했다. 사르트르의 카뮈에 대한 평가는 존중을 기반으로 한 비판이기에 무엇보다 객관적이란 생각이 든다. 또한 그의 추도문은 두 사람의 관계를 곱씹으며 생각하면 더욱 의미가 깊어지기까지 한다.

https://blog.naver.com/sayistory/22268734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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