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고 싶어서
이훈길 지음 / 꽃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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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공간과 기억되는 공간이 있다. 어떤 공간이라도 기억될 수는 있지만, 기억하고 싶은 공간은 그렇지 않다. 기억하고 싶은 공간을 만나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 코로 맡아지는 냄새, 입안에 머무는 미감. 그리고 피부로 느껴지는 촉감까지도 기억하게 된다. 내게는 어린이대공원 안에 있는 꿈마루가 그러하다.

꾹꾹 눌러쓴 손 편지 같은 꿈마루 중에서

하루 동안 동네와 거리에서 만나는 무수한 건물들. 내가 숨 쉬고 있는 공간. 우리는 생활하는 공간. 우리는 건물과 함께 살고 있다. 너무나 그 자리에 있어서 신경 써본 적 없는 집과 건물, 공간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들.

내가 살고 있는 현재 집은 전 집주인이 결혼할 때 직접 지어서 만든 건물이라 했다. 집에 대한 애착이 특별해서 할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집을 팔지 말라고 했단다. 할머니가 가족들하고 살게 되면서 결국 팔리게 되었지만 가족들이 평생을 함께한 공간이라 애착이 크다고 말했다.

비용과 규모가 있기에 그냥 들어서는 건물은 없다. 저마다 사연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공간들. 집 하나도 그럴진대, 오랜 시간 도시에 자리 잡고 있는 소위 랜드마크란 건물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보다 특별하고 남다를 것이다. 도시를 걷는 저자는 꿈마루에서 시대의 변화를 얘기하고, 종로타워에서 도시의 랜드마크인 종로타워가 도시의 상징물이 되었는지 생각한다. 덕수궁, 동묘, 인사동 등 도시의 공간은 제각기 다른 시간을 품고 있다. 오래된 것은 오래된 대로 새로운 것은 새로운 대로 제각각 빛나고 있다.


도시의 산책자가 되어 건축물을 관찰해 보면 보이지 않던 공간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다채로운 풍경을 담은 웰컴 시티는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시간을 들여 오래 둘러보았다. 장충단공원에서 퇴계로로 넘어가는 언덕길을 올라가다 보면 내후성 강판으로 이뤄진 4개의 매스가 눈에 들어온다. 미로 같은 길의 구성 때문에 공간을 천천히 살펴보게 된다.

작은 도시를 담아낸, 웰컴 시티 중에서

산책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시골길, 산길, 고즈넉한 길들을 걷는 이미지들이다. 도시 산책자라 부르는 저자는 건축물을 관찰한다고 표현한다. 미로 같은 공간을 찾는다고 말하는 표현까지 건축가인 저자는 도시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인물인듯하다. 공간의 의미와 삶의 관계를 해석하는 특별한 시각이 경이롭다. 책을 읽으면서 건축이 단순한 기술이 아닌 사람과 삶과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담아야 하는 특별한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 방향에서 웰컴 시티를 보면 노출 콘크리트의 기단과 그 위에 내후성 강판으로 된 네 개의 건물이 공존한다. 네 개의 건물 사이에 세 개의 빈 공간이 있는데, 건축가는 이를 ‘어반 보이드(Urban Void)’라 부른다. ‘어반 보이드’는 건물을 세우고 우연히 남은 공간이 아니다. 도시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의도적으로 비워 도시와 소통시키고자 한 공간이다. 이 공간이 건물을 살아 있게 만든다. 미세하게 서로 다른 각도를 가진 세 개의 보이드는 각기 독립적이며 크기와 모양에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도시와 소통하기 위해 열려 있는 동시에 닫혀 있는 공간이다.

소통이 잘 되는 도시 중에서

열려있지만 닫혀있는 공간이란 무슨 뜻일까. 책에선 설명한 의미 중 건축적인 의미들은 알듯하면서 명확히 와닿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비전문가들이 본다는 것을 감안해서 눈에 보일 듯이 풀어서 설명해 주면 참 좋을 텐데.

알쓸신잡에선 유현준 건축가는 미로 같은 코엑스에서 사람들이 길을 잃고 기피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공간이 어떻게 개선되고 변화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첫 번째 복잡한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공간에 친숙해지지 못한다. 이 경우 랜드마크가 필요한데 변화된 스타시티는 모든 길을 별마루 도서관으로 이어지도록 개선한다. 사람들은 공간에 들어설 때 자신은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하지만 타인이 자신을 모르길 바라는 공간에 숨어들기 위한 심리가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기존의 코엑스는 너무 하얗기 때문에 이 익명성을 활용하기 어려웠다. 하얀 공간은 그대로 유지하되 화려한 벽면 광고를 통해 익명성을 보장하도록 변화했다.


도시는 어떻게 자라고 성장하는가.

작가들은 산책을 좋아하는 듯하다. 버지니어 울프의 산책 에세이, 조동범 작가의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이나 로저트 발저의 산책자 등 도시를 걷는 산책자들의 다양한 책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 더해진 이훈길 작가의 혼자 걷고 싶어서. 작가들은 걸으면서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상상할까. 그리고 나는 걸으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상상할까. 그저 멍 때리며 걸었을 뿐이라면, 주변을 둘러보고 세상의 호흡을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혼자 걷고 싶어서'에서 소개된 다양한 장소들은 주변에 있으나 무심코 지나쳐 온 장소들의 재발견에 가깝다. 일상적인 에세이와는 달리 건축가의 시각이 더해지면서 인문서 느낌을 풍기는 고급스러운 책이다. 덕분에 무심코 지나쳐온 동네들이 새롭게 보게 되었다. 어린이 대공원은 자주 가는 편이나 꿈마루라는 곳이 있는지도 몰랐다. 특히 그 안에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다음에 간다면 한 번은 눈여겨보게 되지 않을까. 시간이 된다면 이 책에 소개된 장소들을 한 번쯤 가보고 싶다.

이 책을 읽은 뒤 걷는 도시의 풍경은 달라진 게 없음에도 보다 특별해진다. 공간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그간 버텨온 시간에 작은 경외감마저 들기도 한다. 공간이 주는 의미를 관심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 책에 나온 30가지 장소는 도시 해석을 위해 작가가 선물한 키워드에 가깝다.

올해 책들은 다 예쁘다. 매일 읽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올해의 목표는 다정해지기입니다. 책장의 책들은 저마다의 예쁨을 뽐내고 있다. 혼자 걷고 싶어는 조금 늘씬하고 긴 형태의 올 컬러 서적이다. 인쇄비가 꽤 많이 들었을 텐데 디자인부터 편집까지 책에 들인 정성과 애정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https://blog.naver.com/sayistory/22267143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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