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공화국
안드레스 바르바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를 보고 책을 많이 선택하는 편인데 안드레스 바르바는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저 스페인 소설은 많이 읽지 않은 편이라 한 번 읽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더하여 좋아하는 환상문학이라니 선택의 망설임이 없었다. 소설에는 검붉은 피와 진초록의 숲, 새파란 하늘 등 원색 특유의 색감들이 대치하듯 배치되어 있다. 특히나 밀림이 바로 옆에 위치한 도시. 그 대비대는 환경이 보여주는 문명과 야생의 질감까지. 대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무채색과는 전혀 다른 색감으로 묘하고 남다른 매력을 준다. 좋은 소설임을 증명하듯이 이 책은 스페인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에랄데상을 수상했으며, 현재는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산크리스토발에서 목숨을 잃은 32명의 아이들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물어본 사람의 나이에 따라 다르게 대답한다.

첫 문장

개발 제한 규제가 풀려 신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한 산크리스토발에 32명의 아이가 나타난다. 마을에서 구걸을 시작한 아이들은 동네 곳곳에서 사고를 친다. 강도 행각을 벌이고 살인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들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나는 일부러 그 말에 강조 표시를 했다. “오랫동안 우리가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았기 때문에 결국 그런 문제가 터지고 만 거예요.” 얼마 전 나는 시청에 근무하는 동료 여자 직원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강도’ ‘도둑놈’ 그리고 ‘살인자’.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던 그 말들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운명을 정하는 것인 반면, 듣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다.

처음엔 구걸을 하던 아이들은 어느 순간 강도로 돌변한다. 슈퍼마켓에서 벌인 난동으로 사람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이에게 벌을 내리고 그들과 격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자는 아이들이 달리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할 수 이는 유일한 수단과 방법이기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그는 어떠한 주장도 내뱉지 않는다. 그 역시 이방인이기에 그는 힘이 없었고 그저 관찰할 뿐이다. 세상의 시선은 같지 않아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해졌다. 그들은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경철 공권력에 불만을 갖는다. 하지만 제도권에서는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기존의 법과 대치되기에 처리할 수 없다고만 말한다. 아이들을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도중 32명의 아이들이 사라진다. 더 큰 비난을 피하기 위해 경찰은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 밀림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밀림을 뒤덮은 초록은 진정한 죽음의 빛깔이다. 흔히 생각하듯, 죽음은 하얀색도 검은색도 아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초록. 무언가를 간절히 갈망하는 듯, 불안하고 숨 막힐 듯 답답한 느낌이 들면서도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거대한 덩어리. 그 안에서 약자들이 강자들을 떠받치고 있는 반면, 거대한 것들은 작고 힘없는 것들로부터 빛을 빼앗는다. 거기서 거인들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미세한 것들뿐이다. 그런 밀림 속에서 32명의 아이들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인간 고유의 저항력을 증명하며 살아남았다.

유일하게 발견된 한 아이를 통해 발견된 아이들의 시체. 문제가 되었던 아이들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도시는 안전해진 것일까? 아이들은 그들을 피해 달아나면서 배신을 했겠지만, 우리 역시 살기 위해 아이들을 배신했다는 화자의 말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어려운 소설이다. 아이들이 저지른 범죄에 화가 났지만, 아이들이 소중히 간직한 병뚜껑과 조약돌을 보다 보면 아이는 아이구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벽에 그려진 매춘부라는 낙서를 보면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진다. 소설 속 아이들을 어떻게 평해야 좋을까?

법과 규율이 없는 세상 속의 아이들에게 현 규정으로 아이를 벌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이 책의 홍보문구를 파리대왕이라고 말하지만, 조금은 결이 다른 방식으로 제도권의 구멍을 얘기하고 있다. 그들의 태도를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제도권 밖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나온다. 동생의 죽음을 알릴 수 없어 여행 가방에 넣어 임의의 장소에 묶는다. 이것 역시 죄라면 죄일 것이다. 하지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아이들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슈퍼마켓 사건 이후 사람들에게 번지는 공포와 두려움이다. 마치 전염병 같은 그것은 형태도 실체도 없으나 사람들은 광신도처럼 무언가를 믿고 있다. 마치 그것이 없어지면 괜찮아질 것처럼 말이다. 이 아이들은 제도권 속에 살았던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의 룰은 우리의 룰과 다르다. 두려움 앞에서 그 말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모두 그 아이가 사라지면 평화를 얻을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 편협한 태도는 그들만의 잘못일까.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듯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난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특히 무슬림), 비둘기나 길고양이를 이유 없이 혐오하는 자세. 조금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유사한 사례는 금방 찾을 수 있다. 찝찝한 뒷맛과 부끄러움이 뒤엉켜 쓴맛만이 남았다.

https://blog.naver.com/sayistory/2226165915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