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엘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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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제목의 끌림, 목차와 홍보글을 통해 유추하는 주제의 애틋함, 작가에 대한 애정. 최신작이지만,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전 번역되어 출간된 '어떻게 지내요'는 매력적인 제목으로 시선을 끌었고, 죽음을 앞둔 친구와의 여행이라는 주제를 통해 그저 애틋해졌다. 문장은 아름다웠고 선택의 후회는 없었다. 이후 시그리드 누네즈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에 책을 선택하는 망설임은 없었다. 저자의 이름만으로도 책은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라는 제목 역시 매력적이다. 어떻게 이런 제목을 지을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으나 책을 받아든 후 심호흡을 하게 된다. 손가락 한 마디 반에 가까운 두께, 무려 600페이지다. 완독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내용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우정에 대한 서사로 600페이지 이상이 넘는 책을 쓸수있다니 시그리드 누네즈 호락호락한 작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시그리드 누네즈가 적어 내려가는 문장은 아름다웠고 여성들의 서사는 눈이 시렸다. 그녀가 적어가는 여성서사는 마법 같은 무언가가 있다. 아직 읽지 않은 '우리가 사는 방식'이란 책이 기대 되는 이유다.


이 소설은 196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세상의 문제에 대응하여 세 여자의 조지, 솔랜지, 앤 세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대마초와 LSD 같은 마약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는데, 당시 히피문화에 대한 사회적 배경지식이 없다면 이 장면들은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다. 솔랜지는 1960년대 퍼져나간 히피정신을 투영한 캐릭터이며, 앤은 당시의 인권 운동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페미니즘의 확산으로 다양한 여성서사들을 보여주고 있으나 사회적 운동의 주류는 언제나 남자들이다. 시그리드 누네즈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남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듯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던 세 여성들의 족적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명예와 영광으로 가득찼을 것 같지만, 그 안에는 희생과 피가 있고, 위험이 공존한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유대와 애정 보살핌으로 서로를 이어간다. 물론 그 관계가 한 없이 아름답고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해와 실수로 서로를 상처 입히기도 하지만, 시간은 이해와 용서를 선물하기에 그들은 서로를 구하고 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라는 제목을 통해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던 '앤'에 대한 이야기일거라 추측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의 부를 수치로 여긴 여인. 하여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워야 했고, 베풀어야 했던 사람. 그녀의 선행은 그녀의 배경으로 인해 진정성은 폄훼되고 빛이 바라기도 한다. 그가 사랑한 흑인들 조차 그녀의 운동을 '혁명 놀이'라 칭하고, 법정에 선 앤에게 판사는 부유한 응석받이, 내지는 철부지라 말하며 꾸짖는다. 판사는 앤이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숭고함은 단순한 일탈로 치부된 이 문장이 무엇보다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판사의 말을 들은 변호사는 그(판사)가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일 수도 있다고 답하는데, 판사와 변호사가 말한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의 의미를 책을 덮은 뒤에도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등장하는 그 부류, 사회의 문제아, 부잣집의 응석받이로 칭해지는 그들. 위태롭지만 무엇보다 숭고한 정신을 지닌 이들을.

조지처럼 나 역시 앤이란 존재에게 경의를 표한다. 동시에 앤이란 존재를 이해하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진보적이고 똑똑한 여성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순종적인 아내이고자 한 모순. 인종 평등을 외치지만 성평등은 외면했던 앤의 모순은 흑인 인권운동 이후 전개된 페미니즘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똑똑한 그녀가 가진 모순은 인간의 한계일까, 당시 사회의 한계일까.

또한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속에서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상처를 주면서 다른 사람을 돕는 앤의 가치는 무엇일까? 동료 재소자는 앤을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희생은 자기자신을 죽이고 있었고, 그것을 최악의 이기심으로 본 것이다. 사회에 반발했던 앤과 솔랜지는 각각의 형태로 자신을 좀먹고 있었다. 한 쪽은 극단적인 희생으로 한 쪽은 약물에 의존한 방임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모습들에는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잔인한 면들이 존재한다. 그렇게 세상은 진보하고 발전해왔는지 모른다.

한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듯 한 캐릭터는 단지 소설에서 끝나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들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의 무수한 조지와 솔랜지 그리고 앤들에게, 그리고 결코 마지막이 아닐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들이 조금은 더 평안하기를, 그리고 조금 더 자신을 사랑하고 덜 상처입기를 기원한다.

https://blog.naver.com/sayistory/222593965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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