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아픈 밤 호밀밭 소설선 소설의 바다 6
정인 지음 / 호밀밭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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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자마자 일러스트를 그린 이를 확인했다. 뭉크의 그림이 생각나는 표지. 표지부터 작품 하나하나가 서늘하게 아파지는 소설집. 소설의 화자들은 여성들이지만, 그들에게는 죽음의 잔상들이 풍경처럼 드리워져 있다. 표지 뿐만 아니라 이 소설 안에서 뭉크의 이미지가 더 짙어지는 이유다.

무엇보다 아픈 삶의 이야기. 그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들 자신이 만든 업보가 느껴지기도 했고, 그 안에서 삶의 비애가 스미기도 했다. 삶에 대한 불안과 애증의 경계 안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집에 불이 난 것은 한낮이었다.

화마 첫 문장

갑작스러운 불과 조각난 일상.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경찰과 국과수, 누전일까 의도적인 방화일까. 방화라면 왜 누가 무엇 때문에 불을 지른 것일까. 화재보험과 생명보험, 남편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작은 의심과 불신. 하나의 사건을 통해 속절없이 무너지는 한 가족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화마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화자의 마지막 말이 인상 깊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가 코 고는 소리를 들었다. 한때는 나를 안심시켰던 그 소리가 오늘은 견디기 어려운 소음이었다. 어쩌면 그도 문밖에 앉은 내게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우리는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오래된 나무처럼 굳세어지지 못하고 바람에 자꾸 흔들리는가. 나는 시려오는 어깨를 감싼 채 달빛 아래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폰의 벨이 울린 것은 새벽잠이 설핏 든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아픈 밤 첫 문장

요양보호사와 환자의 관계를 다루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다루고 있는 누군가가 아픈 밤. 살아있는 이들이 언제 가는 죽는 것처럼,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 역시 언젠가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죽게 되겠지. 요양보호사인 화자의 엄마부터 시작해서, 물레 여사가 죽어버린 딸들 산자와 죽은 자가 수건돌리기를 하는 듯한 작품이다.

나도 갓 이사 와서는 그랬는데 요샌 저 소리에 되려 덜 심심하다우. 가만히 들어보면 사람마다 발소리가 다 다르거든. 그걸 구분해보는 게 솔찮게 재밌어. 나중엔 그 사람이 보이는 거 같어. 그래서 저 손바닥만한 창구멍이 나한테는 숨구멍이나 마찬가지야.

애당초 잘못은 내게 있었다. 층간 소음이 사람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잘 안다고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소리의 함정 첫 문장

층간 소음을 피해 꼭대기 층으로 이사 온 여자. 여우를 피하러 왔더니 호랑이를 만났다는 여자의 말처럼 아랫집에는 층간 소음 때문에 힘들다는 남자가 매일 찾아와 여자를 괴롭힌다. 여자 역시 못 견디겠는 것은 마찬가지다. 남자의 말과 절규는 작은 소리도 못 견뎌 했던 오빠를 떠올리게 했고, 오빠의 죽음을 연결 짓게 만든다. 여자는 이웃의 여자에게 남자를 말려달라고 요청하나 '남의 집'일에 간섭 말라는 핀잔을 듣게 된다. 그때의 한마디가 효과가 있었는지 더 이상 이웃집 남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평화 속에서 여자는 드라마를 보던 여자는 또다시 벨을 누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마주한 집 밖의 남자. 층간 소음과 이웃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나는 남자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바람을 맞은 창이 연신 쿨럭거렸다. 나는 현관문 손잡이를 놓지 못한 채 남자의 들썩이는 어깨를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현실적이고 날카롭게 병든 일상을 파헤친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소설의 화자는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다. 그는 누군가를 아프게 했지만, 동시에 타인에게 상처를 받고 실패하고 분노하지만 동시에 상대를 보듬고 감싸안을 공감과 연민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 아닐까.

소설의 배경에는 죽은 이들이 풍경처럼 둘러져 있다. 그 잔상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살아있는 이들의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 죽은 자의 잔상을 통해 살아 있는 잔상을 보게 만들고, 살아 있는 자들 역시 죽음과 무과하지 않다는 생의 거울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게 만드는 그 구조가 어딘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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