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자들 걷는사람 소설집 4
임성용 지음 / 걷는사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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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등단한 작가의 소설집을 좋아한다. 그들의 문장은 하나같이 날이 서있다. 임성용이란 작가의 소설은 잘 벼려진 칼같다. 무엇을 자르려고 그렇게 날카롭게 갈았을까.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 곧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세계. 임성용이란 작가가 만든 세계는 위태로운 경계를 걷는 것만 같다. 실험하는 문장들이 직조하는 하우스 오브 카드. 곧 무너져내릴 것 같은 위태위태함 속에서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가장 낮은 자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보며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무언가를 살리려면 언제나 무언가를 죽여야 했다. 마음을, 시간을, 살아있는 것들을. 메리를 죽인 그것을.

그게 무엇이든 중에서

얼핏 보기에는 약육강식과 살아남는 것에 대한 소설 같지만, 이 이야기는 어쩌면 그저 견디고 있는 자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근수는 다른 이를 죽여 가족을 지키려 한다. 아무리 타인을 희생해도 죽어버린 아버지와 해체된 가족. 많은 이들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해치고 있다. 하지만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일상의 해체다.

약육강식은 당연한 듯 보이지만, 당연한 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삶을 뒤흔든 남자들에게 복수하면서, 어서 빨리 지나가라고 중얼거리는 근수의 시간. 괜찮다고 말하지만, 괜찮은 것이 아니다. 그저 견디고 있을 뿐.

또 어디서 사고가 났구나. 누군가 죽고 누군가는 더 힘들어지겠네.

지하 생활자 중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두려워하는 나. 매일 울리는 소방 경보로 인해 2005호와 유일하게 관계를 맺는다. 나는 유일하게 2005호의 사람들을 챙기지만, 동시에 그들을 죽게 만든다. 나의 문제 해결 방식은 단순하다. 게으름은 파멸의 무기라는 말처럼 내가 행한 행동은 잘못이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스프링쿨러를 잠근 것, 지하로 숨어든 것, 그녀의 마침표에 동의하지 말았어야 했나라고 되묻는 나의 절규. 하나의 막이 내리고 일상의 소음과 함께 새로운 막이 시작된다. 비극은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창문만을 필요로 해. 그 이상은 감당할 수 없지. 그래서 자기가 경험할 수 있는 만큼인 하나의 창만을 원해.

공원 조 씨 중에서

이번 연구는 실패했어. 너도 그만 인정해. 인간은 달라지지 않아. 더 이상 신화도 종교도 그들에게 통하지 않아. 오히려 자기 식대로 이용만 해 먹고 있잖아. 먹고 싸고 차지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실패한 생물이야. 이대로라면 지구는 백 년도 버티지 못해. 솔직히, 이 행성에서 가장 해로운 생명체가 인간이야. 투자한 물과 햇볕이 아까울 지경이라고. 빨리 할당량이나 채우고 이 쓰레기 같은 행성을 뜨자고. 어차피 멸망할 행성 따위야 회사에서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은 다음에 알아서 처리하겠지. 우리는 연구실에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 그게 우리가 살길이야.

책을 파는 조물주, 공원 조 씨. 가족을 잃은 뒤 조 씨가 보는 세계는 국가, 사회, 제도, 시스템 모든 것이 망가져 있다. 그것은 그의 가족의 해체의 결과이며, 무너진 백화점은 자본주의의 실패를 얘기하는 걸까. 여러모로 뒷맛이 쓴 소설이다.

파이프를 타고 세상을 떠도는 사이 지상에서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바뀌었다. 바다에서는 배가 가라앉고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많이 죽거나 자주 실종되었지만 계절은 계속 바뀌었다. 파이프의 세계에서는 시간도 하나의 존재로 여겨졌다. 다른 여타의 존재들처럼 자신어치의 삶을 소모하고 소멸할 뿐, 내 삶에 관여하지 않았다. 나는 가끔 시간 속에 있거나 시간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파이프 속은 그런 내 착각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늘 컴컴했고 늘 평화로웠다. 나는 점점 더 파이프의 세계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점점 더 혼자가 되어 갔다.

기록자들 중에서

기록자들은 조용한 암살의 기록이다. 실족사한 아버지와 집을 떠난 어머니. '그게 무엇이든'의 근수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살인을 했지만, 결국 가족이 해체된 것처럼. '기록자들'의 나 역시 아버지의 실족사 이후 가족이 붕괴된다. 그리고 암살자와 살인자가 된 두 사람. 나는 왜 살인을 반복하고 기록을 남기는 걸까. 그들은 어떤 이유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는 걸까.


'나의 시선과 선택은 늘 지하를 향했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소설 속 화자들은 지하로 도피하거나 지하에서 숨죽이고 있다. 그들의 가정은 붕괴되고 무너진 삶은 제자리를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화자들이 선택한 것이 또 다른 폭력이라는 점이 비극이다. 연쇄되는 비극과 무너지는 세계.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영화 '기생충'의 어느 한 부분을 잘라 활자화한다면 기록자가 되지 않을까. 소설의 화자는 영화 속 '근세'와 닮아 있다. 소설 속 화자가 보이는 광기는 지하에서 나온 근세가 휘두르는 칼춤과 닮았다. 숨을 죽이며 지금이 지나가길 바라는 '근수(세상에 이름도 비슷하다)'와 기록을 시작하는 '나'는 어떤 최후를 맞게 될까. 근세처럼 '박 사장님 리스펙'이라고 자본주의 찬양하며 쓰러질까, 아니면

https://blog.naver.com/sayistory/22224709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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