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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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욘 포세/ 손화수 옮김/민음사

 

파편화된 시간 속에 놓인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의 의식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시간이 일만 분의 일 초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인간은 이처럼 수없이 파편화된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삶에 대한 압박이 강할수록 내면의 존재하는 두려움, 공포는 시시각각 부피를 키우고 결국엔 존재 자체를 쓰러뜨리고 만다.


욘 포세의 소설 멜랑콜리아는 노르웨이 스타방에르 출신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삶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소설의 구성은 단순하다. 멜랑콜리아 의 첫 부분은 뒤셀도르프의 1853년 늦가을의 어느 날 오후에 시작되고, 두 번째 부분은 가우스타 정신병원의 1856년 크리스마스이브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인 욘 포세는 사건의 발단이 된 뒤셀도르프와 다우스타 정신병원 등, 구체적인 날짜와 장소를 제시하면서도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3년의 행적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한 줄의 여백으로 그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는다. 또한 1991년 늦가을 저녁, 오사네:로 시작하는 1부의 끝부분에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그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 작가 비드메의 등장 역시 한 줄 여백으로 처리한다.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노르웨이 화가 한스 구데가 교수로 재직한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의 학생이며, 남편과 사별한 헨리에테 빙켈만의 집에서 하숙을 하는데, 그녀의 딸 헬레네를 사랑하고 있다. 한스 구데를 만나기로 한 날,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그를 만나러 가지 못하고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차려입고 침대에 누워 있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한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한스 구데에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부담에 압박감을 느끼고, 부정적인 평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욘 포세는 수많은 문장의 반복을 통해 파편화된 라스의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고, 그 불확실성으로 인해 그의 내면은 더욱 파편화된다. 상상과 현실, 사실과 가정, 진실과 거짓, 광기와 이성이 뒤섞여 혼란은 더욱 증폭된다. 자기 자만과 타인에 대한 경멸을 통해 자기 존재의 대한 확신을 가져보려 하지만, 자기 경멸과 타인의 조롱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가는 데는 번번이 실패한다.


라스는 자기 속에 갇혀버린 존재다. 라스를 가둔 것은 내면의 두려움과 공포다.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은 그의 욕망은, 그 욕망의 크기만큼 좌절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내면에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면의 두려움과 공포는 현실의 욕망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고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광기를 드러낸다.


멜랑콜리아 는 라스의 누나 올리네가 화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라스를 떠나보냈고, 그녀 역시 귀도 잘 안 들리고 기억도 가물가물해졌으며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의 일뿐이다. 또한 근처에 사는 또 다른 남동생 쉬버트마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버티고 있다. 그녀의 기억을 통해 라스와 그녀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지만,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기억에 그쳐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는 없다. 그녀는 노쇠한 몸으로 현재를 살고 있지만, 기억은 끊임없이 과거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현재 원초적인 본능(먹고 배설하는 것)의 해결조차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그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생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그것이 과거의 기억인지 현실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작가인 욘 포세는 라스 헤르테르비그와 그의 누나 올리네를 통해 파편화된 의식에 함몰된 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정과 긍정, 확신과 불확실성이 혼재된 수많은 문장의 반복은 그들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불안과 공포, 두려움, 광기를 여실히 드러낸다. 한 문단에 몇 페이지를 할애하며, 내면 의식이 촘촘하고 빼곡하게 인간을 옭아매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불안과 공포, 두려움은 인간 내면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그것은 욕망의 크기와 비례한다. 욕망할수록,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것에 대한 불안과, 욕망하는 바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팽팽하게 긴장관계를 이루며 내면을 잠식해 나갈 것이다. 피폐해진 정신에 이성이 잠식당하면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린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라스가 살고 있다. 라스는 누구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잘 그려 성공한 화가가 되어 노르웨이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후원해 준 한스 가브리엘 부크홀트 순트의 호의에 보답하는 길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 욕망의 크기에 한스는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작가 욘 포세는 그런 한스를 통해 인간 내면의 보편적인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파편화된 의식에 함몰되어 버린 개인에 대한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알아차림이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욕망의 좌절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것, 욕망의 크기를 조절할 수 아는 것 그것이 결국 살아내는 힘일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지나친 욕망을 포기할 줄 알아야 고통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의식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시간은 일만 분의 일 초라 한다. 집착하고 붙들면 그 속에 갇히게 된다. 파편화된 의식들이 흐르게 그냥 두는 것, 알아차리는 것 그래서 자신을 지키는 것, 우리 모두의 숙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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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
데이비드 댐로쉬 지음, 김재욱 옮김 / 앨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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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읽기/데이비드 댐로쉬/김재욱/앨피

이 책은 세계문학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읽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독자를 위한 지침서라 할 수 있다. 지난 4월 제인 마운트의 '우리가 사랑한 세상의 모든 책들'을 읽으며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다'는 사실을 실감했듯 이 책 역시 그렇다.

댐로쉬의 문학 작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몇천 년의 시간을, 동서양의 경계를 뛰어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희열을 느끼게 한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깊이 읽어야 개별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형, 상징들을 발견해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그 길이 너무 아득하기만 하다.

1장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세계문학을 읽을 때에는 차이점과 유사점의 스펙트럼 안에서 양극에 위치한 이화와 동화의 위험성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한다. 그는 서양의 시인들은 그들을 에워싼 세계로부터 예술적 독립성을 주장해 온 반면, 동양의 시인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성찰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이해했음을 피력한다. 따라서 서양에서 시는 허구의 신물이라는 인식이 전제된 반면, 동양은 자아와 동일성의 개념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동양과 서양의 시를 동일한 관점으로 읽을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내게 꽤 충격적인 말이었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의 다른 시관에 바탕을 두고 시를 읽어야 하며, 동일한 전통에서 쓰인 시도, 동시대의 다른 시인의 시들과 비교 대조해서 읽을 때 그의 시적 특징을 더 도드라지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2장 '시간을 가로질러읽기'에서는 '신과 인간'에 대한 관점의 변화 과정을 살피면서 시간을 거슬러 읽기를 권유한다. 거슬러 읽기는 후대의 시인들이 고대의 텍스트에서 어떤 자원들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대한 감각이 생기고 고대 세계가 얼마나 다양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3장 '문화를 가로질러읽기'에서는 다른 문화권의 작품을 읽을 때 작품의 생소함에 질려 독서를 연기하거나 무심결에 친숙한 것으로 받아들여 이미 아는 것에 피상적으로 동화시켜 버림으로써 텍스트의 표면에만 머물게 되는 위험을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댐로쉬는 다른 문화권의 작품들을, 작가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역사적 상황에 맞게 조정해 사용하는 텍스트를 제시하며, 작품의 원형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4장 '번역으로 읽기'에서는 같은 작품의 번역이라도 시대와 번역가의 의도에 따라 번역이 달라짐을 피력한다. 또한 번역이라는 굴절렌즈를 통해 번역가가 그때와 지금, 이곳과 그곳, 다른 언어와 모국어 간의 간극을 고찰하고 그 간극을 메꾸려 할 때 구사하는 전략에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번역의 불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댐로쉬는 훌륭한 번역은 원문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원문에 없던 텍스트가 추가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문학 작품은 번역을 통해 유통된다. 번역에 의존해서 읽을 수밖에 없지만 번역이 가진 한계성을 염두해 두고 읽어야 한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댐로쉬는 2-3개의 다른 번역 작품을 함께 읽기를 권한다.

5장 '멋진 신세계'에서는 낯선 땅을 탐험한 여행가들의 기록을 다룬다. 여행자들에 의해 드러난 낯선 세계는 여행자들의 신념 체계에 의해 구상된 세계라는 것을 독자는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함을 시사한다.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 이야기의 공통된 주제는 유럽의 탐험가가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남긴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시각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실재의 여행 기록이든, 상상의 기록이든 말이다. 독자 또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읽기 않으면, 유럽, 백인, 기독교 중심주의의 그들 사상에 함몰될 수밖에 없겠다는 경각심을 안겨준 챕터다.

6장 '제국을 쓰기'는 식민 지배를 경험한 지역의 작가들을 다룬다. 그들은 모국어로 글을 쓸지, 식민지국의 언어로 글을 쓸지 선택해야만 하고, 세계어로 글을 쓸 때도 작품이 작가의 나라에 대한 해외 독자의 관심사와 견해 혹은 환상에 부합하지 않으면 번역 출판에 난항을 겪을 수도 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식민 지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에 대항한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의 나라 독일어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파울 첼란이 생각났다. 독일어는 그의 모어였다. 식민지국 작가들이 겪게 되는 고충을 느낄 수 있었다.

7장 '세계적 글쓰기'는 오늘날의 작가들이 세계 독자에 다가가기 위해 시도하는 다양한 글쓰기 방법론들을 소개한다. 그들은 탈지역화된 방식을 채택하고 (프란츠 카프카, 보르헤스, 베케트) 글로컬적 전략으로 글을 쓰고 (키플링), 글로컬리즘 방식을(오르한 파묵) 고수한다. 어떤 방식을 채택하든 전 세계의 독자를 염두한 글쓰기일 것이고, 작가들은 전 세계의 자산이 우리의 유산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의 원형을 찾아 4천여 년의 시간 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읽고 쓰는 일, 그 일은 분명 우리를 더 나은 인간이 되게 해 준다고 믿는다. 댐로쉬가 예시로 소개한 텍스트 중 읽지 않은 작품들이 많아 이해가 쉽지는 않았다. 폭넓게 읽기와 깊이 읽기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작품을 읽더라도 그 작품에 한정해서 이해하는 습관도 고쳐야 할 것 같다. 날마다 쏟아지는 책, 그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를 고민하는 이에게 댐로쉬의 책은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 믿는다. 댐로쉬와 다른 견해를 가진 프랑코 모레티의 '멀리서 읽기'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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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8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전승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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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에드거 앨런 포/ 전승희 옮김/민음사

내게 포는 ‘검은 고양이’의 작가다. 그만큼 ‘검은 고양이’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다. ‘검은 고양이’ 한 편으로 나는, ‘환상적이고 기괴하고 기묘하고 공포스럽다.’는 포의 작품에 대한 세상의 평가에 쉽게 동조했다.

이 책에는 열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인간의 이성과 판단 너머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현상, 두려움과 공포, 광기에 대한 세밀한 심리 묘사로 독자들 역시 그 현상을 체험하는 듯 몰입감이 높다.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고대유물판매업자인 나(화자)의 배가 난파하면서 유령선에 타게 된 이야기다. 그곳의 인물들은 화자의 눈앞에 있지만 과거의 기록처럼 존재하고 미래의 예언자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루고 있지만 조잡한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다. 과학과 비과학이 혼재하면서 과거 현재 미래가 구획되어 있지 않는 세계를 보여준다.

라지아-화자는 죽어가는 아내 로웨나의 모습에서 이전의 아내 라지아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현상이 마약으로 인한 환각 때문인지, 그녀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면의 의식 작용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존재한다. 화자인 나는 “인간이 연약한 의지라는 단점만 지니지 않았더라면 천사에게도 죽음에게도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의지는 연약하고, 그 연약한 의지를 지닌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자연 현상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어셔가의 몰락-어셔가는 독특한 감수성을 가진 유서 깊은 가문이다. 극단적으로 예민한 로더릭 어셔는 이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로 무겁고 우울한 저택의 특성이 집안의 운명을 형성해 왔다는 믿음을 지닌 인물이다. 전염성이 강한 그의 미신이 화자에게도 영향을 끼쳐, 불안을 떨치기 위해 읽었던 책 속의 소리를 현실에서 듣게 되는 환상을 경험한다. 어셔와 화자 앞에 죽은 여동생이 나타나지만 공포로 인한 환상인지 실재적 현실인지 모호하다. 어셔는 저택의 돌, 그 위를 덮는 이끼의 배치 등 식물적 존재뿐만 아니라 무생물의 존재도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을 가진다. 결국 어셔는 자신의 믿음에 의해, 오래된 저택의 몰락과 운명을 같이 했는지도 모른다.

윌리엄 윌슨-이 작품은 데미안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두 개의 자아일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하듯, 끊임없이 자신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폭로하는 윌리엄 윌슨은, 화자인 윌리엄 윌슨의 또 다른 자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규정해 놓은 선의 세계와, 그것에서 탈주하고 싶은 인간의 양면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군중 속의 사람-화자인 나는 수많은 군중의 옷차림만으로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낸다. 하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뒤쫓은 노인이 왜 군중 속에서 방황하는지, 그런 행위를 반복하는지 알아내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혼자이기를 거부하는 군중 속의 노인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읽히기를 거부하는 책처럼, 누구도 타인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결국 인간은 군중 속에서 살아가지만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피력한다.

소용돌이 속으로의 추억-바다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가 생존한 노인이 화자에게 그때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이야기다. 자연현상의 불가사의함 그것은 인간의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신의 영역이다.

타원형의 초상화-눈먼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화가는 그림에 눈멀고 화가를 사랑하는 그녀는 화가에 눈멀었다. 화가는 자신이 눈먼 대상인 그림만 보고 있었기에,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대상에 집착할수록 대상을 벗어난 다른 사물들은 곁에 있음에도 그 대상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붉은 죽음의 가면극-붉은 죽음이라 부르는 역병을 피해 대사원에 모인 사람들, 완벽하게 외부 세계와 차단된 공간에서 그들은 날마다 먹고 마시고 취한다. 그러나 물리적인 성문을 봉쇄하고 외부 세계와의 완벽한 차단을 자신했지만,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과 공포로 인해 텅 빈 존재인 유령에 의해 몰락하고 만다.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에 도사린 불안과 공포라는 것을 인지하게 해 주는 작품이다.

구덩이와 추-극한 상황(죽음)에 내몰린 인간의 복합적인 심리 묘사가 탁월한 작품이다. 또한 종교재판이라는 명분으로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성과 잔인성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며 죽음에 저항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배반의 심장-소리에 민감한 주인공이 함께 살던 노인을 살해하고, 자신의 귀에서 나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범행사실을 자백하고 만다. 노인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인을 살해하고 자신의 살해를 정당화하지만 결국 타인에게는 들리지 않는 환청에 의해 죄를 자백한다. 화자가 들었던 환청은 자신의 양심이 자신을 벌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검은 고양이-나(화자)는 자신이 어린 시절 동물을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었음을 고백하면서도, 인간은 지고하신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존재이며, 고양이는 한갓 야수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인식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아내를 죽이고 사체를 벽에 은닉한 자신의 죄가 고양이에 의해 폭로되는 결과는 이런 인간 우월의식에 내려진 벌인지도 모르겠다.

도둑맞은 편지-이 작품은 심리소설이나 탐정소설로 읽어도 좋은 작품으로, 인간의 복잡한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타인에 대한 판단이나 평가에 있어 철저하게 주관적인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자는 결국 자신도 파멸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아몬티아도 술통-이 작품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는 그 자신도 같은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또 경쟁자에 대한 질투심이 얼마나 쉽게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하는가를 보여준다.

깡충개구리, 혹은 사슬에 묶인 여덟 마리의 오랑우탄-궁정에 잡혀 온 어릿광대와 난쟁이. 이들은 왕과 대신들의 유희를 위한 소유물이다. 어릿광대와 난쟁이의 신체적 결함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학대하는 행위를 통해 즐거움을 얻던 왕과 대신들은, 자신들이 하찮게 여기던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생각나는 작품이다.

포의 단편을 읽는다는 것은 포를 읽는 일이다. 그가 얼마나 깊이, 인간의 감정을 들여다 보았는가가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집이었다. 그 안간힘이 작품마다 느껴져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러나 결국 군중 속의 노인을 뒤쫓아 간 나(화자)가 느낀 막막함처럼 인간은 여전히 읽히지 않는 존재다. 인간은 초자연적인 현상에서도 살아날 수 있고, 자신의 양심에 의해서 무너질 수도 있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어쩌면 포는 초자연적인 현상(신), 인간, 공존하는 동식물, 무생물까지 그 모든 곳에서 인간을 발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배경들은 지하실, 오래된 저택, 폐쇄된 대사원, 구덩이 등 무겁고 어둡고 축축하다. 빛과 밝음의 반대편이다. 포가 주목한 인간의 심연 또한 날 것의 본능적 감정들이 꿈틀거리는 그 지점이었던 것 같다.

#애드거 앨런 포 단편선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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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 연고 작가기획시선
박미자 지음 / 작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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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유는 바다와 맞닿아있다. 시인에게 있어 바다는 아버지다. ‘바닷물 연고‘는 아버지께 바치는 헌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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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2 세트 - 전2권 괴테 전집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전영애 옮김 / 길(도서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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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전영애 옮김/ 도서출판 길

파우스트의 많은 번역본 중에서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운문처럼, 첫 번역처럼”이라는 단 한 문장이었다. 단테의 『신곡』을 읽었을 때 이 작품이 시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물론 시는 번역불가능의 장르다. 『신곡』을 읽을 즈음, 원문의 『신곡』을 유튜브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던 이유는, 리듬과 운율 때문이었다. 번역된 시에서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평생 괴테 연구에 몰두한, 스스로를 괴테 할머니라 부르는 전영애 교수가 “시(詩)답게” 되살린 문장이라는 글을 보고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주문했다.

괴테가 60년을 두고 써낸, 12,111행의 운문이라는 두 가지의 사실만으로도 내겐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책이다. 거기다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3000여 년의 유럽 남북방을 다 아우르는 작품이다. 『파우스트』에서는 인간의 욕망이, 인간의 생애가. 인간이 그려진다. 『파우스트』는 괴테의 순수 창작은 아니다. ‘파우스트’는 괴테가 어린 시절에 인형극으로도 보고 또 커서는 영국의 말로가 작품화해서 영국 유랑극단이 독일을 돌아다니며 공연도 했던 작품이다. ‘파우스트’라는 욕심 많은 인간이 있었는데 악마와 계약하여 영혼을 팔아서 24년 동안 온갖 복락을 누렸지만 결국 지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로, 우리나라 흥부놀부이야기처럼 기독교권 세계의 권선징악 이야기의 하나다. 괴테는 24년의 한시적 계약을 더는 바랄 바가 없어서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때까지 악마가 봉사해야 하는 ‘내기’로 바꾼 것이다. (옮긴이 해제 참조)
  
“괴테가 60년을 두고 쓴 작품, 그 추동력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는 구절이라고 전영애 교수는 말한다. 철학, 법학, 의학, 신학까지, 중세의 모든 학문을 섭렵한 파우스트지만 “알게 된 거라곤,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뿐!”이라는 탄식을 쏟아내며, 결국 악마에게 영혼을 팔게 된다. 학문의 최고 경지, 사회적인 성공, 사랑, 부와 명예 등 지상의 어떤 가치도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지도, 인간을 구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결국 세상의 물리적인 가치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기에, 물질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은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파우스트』는 그런 인간의 방황을 긍정하고 있다. 인간의 방황은 삶을 자신에게로 되돌리기 위한 의지의 표명이다. 끊임없는 방황은 영혼의 자유와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인 것이다. 방황에 대한 긍정, 그것은 완벽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긍정인 동시에, 인간 속에 내재된 본성에 대한 긍정이다. 이는 ‘방황하는’ 모든 존재들에 건네는 위로다. 완벽하지 않음으로 인간은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학문적인 성취가 목적이었던 파우스트는 자신의 삶을 떠나, 사랑을 경험하고 국가의 재정 위기를 해결해 능력을 인정받고 고대 그리스 시대로 가 헬레나를 만나는 등의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여정을 경험하지만, 그런 여정들에서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를 쉬이 외치지 않는다.

파우스트
나는 다만 세상을 달려왔다
욕망 하나하나의 머리채를 틀어쥐었고
내게 흡족하지 않은 건, 떨쳤으며
내게서 벗어나는 건, 가게 두었다.
나는 다만 갈망하고, 다만 이루어내었고
또다시 소망하고, 그렇게 힘으로써
나의 삶을 돌파해 왔다. 처음에는 거대하고 힘 있게,
그러나 이젠 현명해졌다. 생각이 깊어졌다.
지상의 일은 이제 충분히 아는데,
저 높은 곳을 향한 전망은 막혀버렸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누려 마땅한 자는
날마다 그것들을 싸워서 얻어내야 하는 자뿐.
하여, 위험에 에워싸여 있음에도,
여기서는 아이도, 어른과 노인도 그 알찬 세월을 보낸다.
그런 무리를 나는 보고 싶노라,
자유로운 터에 자유로운 백성과 서고 싶노라.
그 순간에게 내가 말해도 좋으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자유와 생명을 누리기 위해 날마다 그것들과 싸워 이겨내는 것, 위험에 에워싸여 있음에도 기꺼이 그 세월 속에 존재하는 것, 그것을 실천하는 무리들과 함께 서 있는 것, 파우스트가 멈추고 싶은 순간이다. 이것이 파우스트의, 괴테의 지향일 것이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서만 자신의 사유를 펼치지 않는다. 수많은 등장인물들 모두가 괴테다. 삶이, 인간이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모든 순간이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를 외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임을 안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영혼의 자유와 구원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 이런 통찰과 지혜를 얻기는 쉽지 않다. 방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성모를 부르는 이 두 행은 제1부 성벽 앞 장면에서 괴로움에 찬 그레트헨이 부르던     성모의 이름 “그대 고통 많으신 이”와 각운이 맞는다(3588행) 8,000행 이상을 건너   뛰어 맞추어진 이 운은 12,077행과 연결되어 그레트헨의 비극과 구원을 잇는 작지   만, 비중 있는 장치로 읽힌다. “파우스트를 만난 헬레나가 처음에는 그리스 운율로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게르만 운율로 이야기한다”

위 첫 문장은 각주 514의 글이다. 두 번째 문장 역시 독자가 간파하기 힘든 부분에 대한 각주다. 전영애 교수의 번역은 그만큼 촘촘하고 꼼꼼했다. 독일어의 각운을 느낄 수는 없지만, 그리스 운율과 게르만의 운율을 구별하지는 못하지만, 8,000행 이상을 건너뛰어 맞춘 각운을 통해, 괴테의 의도를 가늠해 보는 일은 이 책이 주는 또 다른 가슴 벅참이었다. 다양한 사건과 장소와 이야기를 펼쳐놓고 종국엔 그것을 전체로 통합시키는 힘, 괴테였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을 감지해 낼 수 있고 그 리듬과 함께 출렁일 수 있는 원문을 읽는 독자들에 대한 부러움도 느꼈다.  

괴테가 스물두 살에서 여든두 살까지 쓴 작품, 책이 낱장이 되어 흩어질 때까지 읽었다는 전영애 교수. 그런 『파우스트』를 설익게 읽고, 읽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다. 그렇지만 두 문장은 오롯이 남았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와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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