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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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한강/문학동네

작별할 수 없는 사람들


정동은 동사적 의미와 명사적 의미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명사적 의미로서의 정동은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감정이나 강렬한 느낌으로 이해한다. 명사 형태에서도 정동은 움직임으로 강조하고 있다. 정동들은 느낌이나 욕망을 경험하는 주체가 움직일 수 있도록 행동으로 이어지거나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정동은 느낌들의 닿음이며, 느낌들은 이러한 형태의 접촉에 의해 활성화된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나는 정동을 생각했다. 이 책은 화자인 경하, 그리고 한때 경하와 함께했던 친구 인선, 인선의 어머니(강정심)를 통해 국가권력이 한 가족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제주4•3사건)를 보여주고 있다. 인선, 경하, 그리고 인선의 어머니는 4•3사건이라는 비극적 역사 앞에 정동적 존재로 연결되어 있다. 4•3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화지인 경하 역시 악몽을 통해 그들과 연결되어 있고. 인선 역시 4•3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어머니와 어머니의 가족, 아버지의 서사를 통해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 직접적인 비극의 역사를 관통한 인선의 어머니 강정심의 서사를 통해 그들은 더 깊은 역사적 비극에 직면하게 된다.

화자인 경하는 제주 친구 인선의 부탁으로 빈집의 새를 보살피러 눈보라를 뚫고 갔다가, 꿈을 통해 죽은 인선의 어머니와 만난다. 인선의 어머니는 4•3사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로 오십여 년을 제주에서 대구로, 진주로, 여수로, 그리고 경산으로 당시 실종된 오빠의 흔적을 찾아 다녔지만, 결국 오빠를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강정심이 모은 자료는 2001년까지 이어진다. 그녀는 50여 년의 세월이 그 사건에 묶여 있었다. 인선의 어머니는 결국 오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도, 오빠와 작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하와 인선은 어머니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4•3사건을 실체를 밝혀나간다.

4•3사건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실체를 드러냈다. 불교의 연기법은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통찰을 제공한다. 정동과 불교의 연기법은 인선, 경하, 인선의 어머니, 그리고 4•3사건의 피해자와 생존자만이 정동적인 존재가 아님을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다.

한강 작가는 4•3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강정심이 아닌 2세대인 경하와 인선을 통해 이 사건을 풀어간다. 강정심이 실종자 오빠와 이별할 수 없었듯, 그들 역시 4•3사건과 이별할 수 없음을, 이별하지 않아야 함을 자각한다. 정동이 느낌들의 닿음이며 느낌들은 이러한 형태의 접촉에 의해 활성화되듯, 이 책과의 접촉을 통해 독자들 또한 정동적 존재로 4•3사건을 바라보기를 작가는 바랄 것이다. 그 힘들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진실에 다가가길 염원할 것이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가진 위력을 믿는다.

경하는 제주에서 거대한 눈보라를 만나, 인선의 집으로 가는 길이 지체되고 지연된다. 그 사이 인선이 부탁했던 새는 목숨을 잃고 만다. 눈보라는 거대한 힘 권력의 상징이며, 새는 그 권력에 희생된 무고한 이들의 생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파닥거리는 새의 작은 심장처럼 안타깝고 안쓰러운 숨소리가 문장 곳곳에서 느껴져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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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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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조지 오웰/정회성 옮김/민음사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저항하다.

  우리는 예측 가능한 일에는 크게 당혹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1984』년 1949년에 출간되었다. 1949년에 이 책을 만난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가 궁금해지던 책이다. 막연한 상상과 공상으로 만들어진 미래 소설쯤으로, 그들로서는 예측 가능하지 않았던 세계였을 것이다. 『1984』는 오늘날 사회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한 세계다. 그만큼 『1984』는 지금을 더 닮아있는 소설이다. 그들의 통제기구였던 텔레스크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 등은 오늘날의 과학 기술로 충분히 가능한 시스템이다.
  『1984』를 읽으며 자연히 『동물농장』을 떠올리게 되었다. 두 권 모두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 깔려있다. 『동물농장』에서 절대 권력이 어떻게 타락해 가는지에 대한 비판이 전제되어 있다면, 『1984』에서는 절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이용하고 통제하는지에 대한 비판이 깔려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에 대한 저항이 강했던 조지 오웰의 신념이 두 책 모두에 잘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4년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로 나뉘어 있고, 이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그것은 국경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분쟁으로, 각 대륙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활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이를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끊임없이 불안을 조장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있다.
  작품의 배경은 오세아니아다. 오세아니아의 정치 통제 기구인 당은 허구적 인물인 빅브라더를 내세워 독재 권력을 극대화한다. 뿐만 아니라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 등을 이용해 끊임없이 당원들의 사생활을 감시한다. 또한 그들은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과거의 기록들을 날조하고 수정한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언어를 버리고, 신어를 창조해 인간의 의식을 통제한다. 또한 반역자를 내세움으로써 그에 대한 증오를 표출케 하고, 표출된 증오심을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들은 또한 인간의 성욕까지 통제한다. 섹스는 부부의 경우에만 허용되며, 이 또한 성적 쾌락은 배제된 채, 당에 봉사할 아이를 낳는 데만 그 목적이 있다.
  주인공 원스턴 스미스는 당의 필요에 의해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맞게 조작하는 일을 맡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당의 체제와 실체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금지된 일기를 쓰고, 같은 곳에 근무하는 줄리아와 연인 관계를 이어가며, 반당 지하단체인 ‘형제단’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당의 전복을 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사상경찰에 체포된다, 자신과 같이 당에 저항하는 인물이라고 믿었던 오브라이언은 실상 당의 감시자였으며, 감옥에 갇힌 원스턴 스미스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게 만든다. 모진 고문과 세뇌를 견디지 못한 원스턴은 연인(줄리아)의 존재를 부정하고, 당의 모든 사상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로 이 책은 끝이 난다. 원스턴 스미스가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을 기대했던 독자들을 좌절시킨 문장이다. 조지 오웰은 거대한 권력 앞에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며 소설을 끝냈다.
  오늘날 전체주의는 사라졌다. 하지만 과학과 통신의 발달로 소설 속 감시체계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다. 수많은 CCTV가 우리의 행동반경을 감시하고 있다,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순간 곳곳에서 노출되고 있다. 개인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감시망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국가에 의해 블랙리스트가 작성되기도 하고,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인터넷 범죄가 개인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다. 또한 거대 담론으로 작동하는 세계화, 전지구화의 흐름은 그 속의 개인의 존재를 무력화시켰다. 경제력이 또 다른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주인공 원스턴 스미스가 당 체제에 굴복하는 모습은 저항의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던 조지 오웰은 인간의 존엄을, 인간의 의식을 이처럼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절대 권력을 고발함으로써 저항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1984』 속 감시와 지배가 지금의 현실과 닮아있다 생각하니 참 서늘하다. 지배 담론에 함몰되지 않는 개인, 지배 담론에 저항할 수 있는 개인의 존재는 여전히 요원할 걸까. 어쩌면 그 질문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닐까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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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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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홍한별 옮김/다산책방/2024

 

사소함의 위대함

 

우리는 거대담론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세계는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되고, 환경과 기후, 전쟁 등은 전지구적인 관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정치와 경제 또한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로 작동된다. 점점 거대화되고 집단화되는 세계 속에서 개인은 외면당하며 점점 왜소해진다. 개인은 사소한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저자 클레어 키건은 거대한 혹은 부당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말하거나 말하지 못한 사소한개인의 감정과 행동임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중심인물인 빌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나, 석탄 파는 일로 아내와 다섯 딸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에 충실한 인물이다. 그의 삶은 풍족하지 않지만, 배고픔과 추위를 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운이 참 좋다고 여긴다. 펄롱의 엄마는 열여섯 살 때 미시즈 월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했고, 아버지가 누군지를 듣지 못한 채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러나 펄롱은 과거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어린 시절의 결핍이 현실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고자 하는 의지로 작용해, 그는 다섯 딸을 부양하는데 집중했다.


어느 날 저녁 약속한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수녀원에 배달을 갔다가, 젊은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들 여남은 명이 바닥에 엎드려서 죽어라고 바닥을 문지르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들 중에 신발을 신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검은 양말에 끔찍한 회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눈에 흉측한 다래끼가 난 아이도 있었고, 머리카락이 눈먼 사람이 커다란 가위로 벤 것처럼 엉망으로 깎여 있었던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가 펄롱에게 도와달라고, 강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대문 밖으로 만이라도 나가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펄롱이 거절하자 그러면 집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일하다 죽을 때까지 일하겠다고 말하지만, 펄롱은 집에는 딸 다섯하고 아내가 있다며 이를 거절한다. 그날 밤 아내에게 수녀원에서 본 것을 이야기했지만, 아내 아일린은 그런 일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으며, 그래야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충고를 한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갔다가 펄롱은 석탄 광에서 한 소녀를 발견한다. 펄롱은 여자아이가 하룻밤 이상을 그곳에 머물렀음을 알아차린다. 밖으로 나온 아이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데다 머리가 엉망으로 깎여 있었다. 아이는 14주 된 아기를 둔 엄마였고, 그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도 없고,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다며 말한다. 펄롱과 아이를 본 수녀 원장은 그들을 환대한다. 다른 수녀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던 아이가 다시 나타나자 원장은 아이에게 광에 갇힌 이유를 묻고, 아이는 자신이 광에 갇힌 이유가 숨바꼭질 놀이 때문이었다고 말하며,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고 말한다. 펄롱으로 하여금 그 사고는 단순히 아이들의 놀이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었음을 믿게 하려는 의도였다.


수녀원은 직업 여학교를 운영하며 세탁소도 겸업하고 있었다. 수녀원은 온갖 뒷소문이 무성한 곳이다. 세탁소는 평판이 좋았고, 직업학교에 있는 여자들은 타락한 여자들이어서 교화를 받는 중이라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더러운 세탁물에 얼룩을 씻어내면서 속죄하는 거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 동네 간호사는 열다섯 살 아이가 빨래통 앞에 서서 너무 오래 일한 탓한 정맥류가 생겼더라고 했다, 반면 그곳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 쪽은 수녀님들이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 그곳은 그냥 모자 보호소로 결혼 안 한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가족이 미혼모를 그곳에 보내 숨기고 사생아로 태어난 아기는 입양을 보내고, 그 과정에서 수녀들이 상당한 돈을 챙기고 그게 수녀원에서 하는 사업이라고도 했다.


마을 사람들 다수는 수녀원에서 행해지는 비도덕적인 일을 알고 있었다. 아내 아일린이 그런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며 모른 척해야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펄롱에게 충고했듯, 식당을 운영하는 미시즈 케호 역시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며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고 충고한다. 석탄 광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온 날,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그 아이가 펄롱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다정하던 태도를 바꾼다. 다섯 딸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펄롱에게 이 근방 잘 풀린 여자애 중에 그 학교에 안 다닌 애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라는 미시즈 케호의 충고는 펄롱의 마음을 더욱 위축되게 만든다.


펄롱은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의 부탁을 거절했고, 수녀원의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외면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행위가 딸들의 장래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더구나 수녀원의 원장 역시 딸 둘이 여기 학교에 다니고 있고, 다른 둘은 이곳에서 음악 수업을 받고 있으며 꽤 진척이 있음에 관심을 표명하며, 요즘은 애들이 너무 많아 모든 애들이 다 갈 곳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당신의 행동 여부에 딸들의 장래가 걸려 있다는 암묵적인 협박이다. 펄롱은 수녀원 원장이 건네는 말의 진위를 알아챘으며, 이성적으로는 그런 결론에 다다랐음에도 그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가족이 있는 집으로 쉬,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방황한다.

크리스마스 전등이 켜진 시내를 거닐고, 오래된 스태퍼드 상점 앞에 머물고, 조이스 가구점 앞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는다. 핸리핸 가게에서 아내에게 선물할 구두를 찾고, 문 열린 튀김집에 들러 세븐업 한 캔을 마신 뒤 다시 강가로 걸으며 왜 편안하고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를 생각한다. 그렇게 편안하게 집으로 향하지 못했던 그는, 결국 예전에 아이를 발견한 수녀원의 석탄 광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곳에는 자신이 이전에 구해준 그 아이를 다시 만난다. 단순한 술래잡기 놀이 때문에 그곳에 갇혔다고 말했던 그 소녀는, 여전히 그 광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펄롱은 자기 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자신을 보며, 사제관으로 아이를 데려갈까 생각했지만, 그는 다 한통속이야를 외치며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다.

아이를 데리고 거리에 나선 펄롱은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을 한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맨발의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 역시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며, 더 옛날이었다면 자신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는,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하려고 자신이 펄롱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평생 숨기고 살았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이 보여준 친절, 네드의 배려 등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이 합쳐져 하나의 삶을 이루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사소한 것이 지금의 자신이 존재하게 했다는 사실도.


이 소설은 허구지만, 아일랜드 국가와 가톨릭교회의 묵인 하에 자행했던 부당한 노동과 아동 학대, 유아 사망 등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쓰였다. 국가와 교회의 거대한 권력이 자행하는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 대다수의 개인은 침묵하거나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족을 지켜야 했고, 삶을 영위해야 했기에. 그들이 지켜가야 하는 삶은 작은 균열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을 만큼 위태롭고 빈약했다.


미혼모인 펄롱의 엄마를 받아들인 미시즈 윌슨이나, 더 나은 혈통이 가진 이가 자신의 아버지일 거라고 믿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숨긴 네드의 배려 덕분에 펄롱의 지금이 존재할 수 있었듯, 수녀원의 높은 성벽 속에 갇혀 살던 아이는 서로 돕는 사소한 행위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펄롱으로 인해 삶이 펼쳐지는 이곳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작은 관심과 사랑이 미시즈윌슨과 네드에서 펄롱에게로, 펄롱에게서 아이에게로 흐를 것이다. 이 땅에서 인간의 삶이 영위될 수 있게 한다.


사소한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된다. 사소한 개인이 모여 집단이 된다. 거대담론 속 개인은 갈수록 왜소해지지만, 결국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은 그 개인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삶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작고 소박한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부당한 권력을 무너뜨리고 그 속에서 고통 받는 개인을 그곳이 아닌 이곳으로 구출해 낼 수 있을 만큼 힘이 세다.

이 책은 참 잔잔하다. 내면의 묘사가 그렇고 풍경의 묘사가 그렇다. 그러나 그 잔잔함을 뚫고 무엇인가가 자꾸 생겨난다. 격렬하지 않은데 멈추어 있지도 않다. 자꾸만 골똘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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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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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욘 포세/ 손화수 옮김/민음사

 

파편화된 시간 속에 놓인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의 의식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시간이 일만 분의 일 초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인간은 이처럼 수없이 파편화된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삶에 대한 압박이 강할수록 내면의 존재하는 두려움, 공포는 시시각각 부피를 키우고 결국엔 존재 자체를 쓰러뜨리고 만다.


욘 포세의 소설 멜랑콜리아는 노르웨이 스타방에르 출신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삶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소설의 구성은 단순하다. 멜랑콜리아 의 첫 부분은 뒤셀도르프의 1853년 늦가을의 어느 날 오후에 시작되고, 두 번째 부분은 가우스타 정신병원의 1856년 크리스마스이브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인 욘 포세는 사건의 발단이 된 뒤셀도르프와 다우스타 정신병원 등, 구체적인 날짜와 장소를 제시하면서도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3년의 행적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한 줄의 여백으로 그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는다. 또한 1991년 늦가을 저녁, 오사네:로 시작하는 1부의 끝부분에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그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 작가 비드메의 등장 역시 한 줄 여백으로 처리한다.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노르웨이 화가 한스 구데가 교수로 재직한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의 학생이며, 남편과 사별한 헨리에테 빙켈만의 집에서 하숙을 하는데, 그녀의 딸 헬레네를 사랑하고 있다. 한스 구데를 만나기로 한 날,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그를 만나러 가지 못하고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차려입고 침대에 누워 있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한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한스 구데에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부담에 압박감을 느끼고, 부정적인 평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욘 포세는 수많은 문장의 반복을 통해 파편화된 라스의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고, 그 불확실성으로 인해 그의 내면은 더욱 파편화된다. 상상과 현실, 사실과 가정, 진실과 거짓, 광기와 이성이 뒤섞여 혼란은 더욱 증폭된다. 자기 자만과 타인에 대한 경멸을 통해 자기 존재의 대한 확신을 가져보려 하지만, 자기 경멸과 타인의 조롱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가는 데는 번번이 실패한다.


라스는 자기 속에 갇혀버린 존재다. 라스를 가둔 것은 내면의 두려움과 공포다.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은 그의 욕망은, 그 욕망의 크기만큼 좌절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내면에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면의 두려움과 공포는 현실의 욕망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고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광기를 드러낸다.


멜랑콜리아 는 라스의 누나 올리네가 화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라스를 떠나보냈고, 그녀 역시 귀도 잘 안 들리고 기억도 가물가물해졌으며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의 일뿐이다. 또한 근처에 사는 또 다른 남동생 쉬버트마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버티고 있다. 그녀의 기억을 통해 라스와 그녀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지만,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기억에 그쳐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는 없다. 그녀는 노쇠한 몸으로 현재를 살고 있지만, 기억은 끊임없이 과거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현재 원초적인 본능(먹고 배설하는 것)의 해결조차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그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생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그것이 과거의 기억인지 현실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작가인 욘 포세는 라스 헤르테르비그와 그의 누나 올리네를 통해 파편화된 의식에 함몰된 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정과 긍정, 확신과 불확실성이 혼재된 수많은 문장의 반복은 그들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불안과 공포, 두려움, 광기를 여실히 드러낸다. 한 문단에 몇 페이지를 할애하며, 내면 의식이 촘촘하고 빼곡하게 인간을 옭아매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불안과 공포, 두려움은 인간 내면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그것은 욕망의 크기와 비례한다. 욕망할수록,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것에 대한 불안과, 욕망하는 바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팽팽하게 긴장관계를 이루며 내면을 잠식해 나갈 것이다. 피폐해진 정신에 이성이 잠식당하면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린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라스가 살고 있다. 라스는 누구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잘 그려 성공한 화가가 되어 노르웨이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후원해 준 한스 가브리엘 부크홀트 순트의 호의에 보답하는 길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 욕망의 크기에 한스는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작가 욘 포세는 그런 한스를 통해 인간 내면의 보편적인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파편화된 의식에 함몰되어 버린 개인에 대한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알아차림이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욕망의 좌절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것, 욕망의 크기를 조절할 수 아는 것 그것이 결국 살아내는 힘일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지나친 욕망을 포기할 줄 알아야 고통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의식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시간은 일만 분의 일 초라 한다. 집착하고 붙들면 그 속에 갇히게 된다. 파편화된 의식들이 흐르게 그냥 두는 것, 알아차리는 것 그래서 자신을 지키는 것, 우리 모두의 숙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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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
데이비드 댐로쉬 지음, 김재욱 옮김 / 앨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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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읽기/데이비드 댐로쉬/김재욱/앨피

이 책은 세계문학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읽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독자를 위한 지침서라 할 수 있다. 지난 4월 제인 마운트의 '우리가 사랑한 세상의 모든 책들'을 읽으며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다'는 사실을 실감했듯 이 책 역시 그렇다.

댐로쉬의 문학 작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몇천 년의 시간을, 동서양의 경계를 뛰어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희열을 느끼게 한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깊이 읽어야 개별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형, 상징들을 발견해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그 길이 너무 아득하기만 하다.

1장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세계문학을 읽을 때에는 차이점과 유사점의 스펙트럼 안에서 양극에 위치한 이화와 동화의 위험성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한다. 그는 서양의 시인들은 그들을 에워싼 세계로부터 예술적 독립성을 주장해 온 반면, 동양의 시인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성찰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이해했음을 피력한다. 따라서 서양에서 시는 허구의 신물이라는 인식이 전제된 반면, 동양은 자아와 동일성의 개념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동양과 서양의 시를 동일한 관점으로 읽을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내게 꽤 충격적인 말이었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의 다른 시관에 바탕을 두고 시를 읽어야 하며, 동일한 전통에서 쓰인 시도, 동시대의 다른 시인의 시들과 비교 대조해서 읽을 때 그의 시적 특징을 더 도드라지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2장 '시간을 가로질러읽기'에서는 '신과 인간'에 대한 관점의 변화 과정을 살피면서 시간을 거슬러 읽기를 권유한다. 거슬러 읽기는 후대의 시인들이 고대의 텍스트에서 어떤 자원들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대한 감각이 생기고 고대 세계가 얼마나 다양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3장 '문화를 가로질러읽기'에서는 다른 문화권의 작품을 읽을 때 작품의 생소함에 질려 독서를 연기하거나 무심결에 친숙한 것으로 받아들여 이미 아는 것에 피상적으로 동화시켜 버림으로써 텍스트의 표면에만 머물게 되는 위험을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댐로쉬는 다른 문화권의 작품들을, 작가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역사적 상황에 맞게 조정해 사용하는 텍스트를 제시하며, 작품의 원형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4장 '번역으로 읽기'에서는 같은 작품의 번역이라도 시대와 번역가의 의도에 따라 번역이 달라짐을 피력한다. 또한 번역이라는 굴절렌즈를 통해 번역가가 그때와 지금, 이곳과 그곳, 다른 언어와 모국어 간의 간극을 고찰하고 그 간극을 메꾸려 할 때 구사하는 전략에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번역의 불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댐로쉬는 훌륭한 번역은 원문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원문에 없던 텍스트가 추가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문학 작품은 번역을 통해 유통된다. 번역에 의존해서 읽을 수밖에 없지만 번역이 가진 한계성을 염두해 두고 읽어야 한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댐로쉬는 2-3개의 다른 번역 작품을 함께 읽기를 권한다.

5장 '멋진 신세계'에서는 낯선 땅을 탐험한 여행가들의 기록을 다룬다. 여행자들에 의해 드러난 낯선 세계는 여행자들의 신념 체계에 의해 구상된 세계라는 것을 독자는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함을 시사한다.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 이야기의 공통된 주제는 유럽의 탐험가가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남긴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시각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실재의 여행 기록이든, 상상의 기록이든 말이다. 독자 또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읽기 않으면, 유럽, 백인, 기독교 중심주의의 그들 사상에 함몰될 수밖에 없겠다는 경각심을 안겨준 챕터다.

6장 '제국을 쓰기'는 식민 지배를 경험한 지역의 작가들을 다룬다. 그들은 모국어로 글을 쓸지, 식민지국의 언어로 글을 쓸지 선택해야만 하고, 세계어로 글을 쓸 때도 작품이 작가의 나라에 대한 해외 독자의 관심사와 견해 혹은 환상에 부합하지 않으면 번역 출판에 난항을 겪을 수도 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식민 지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에 대항한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의 나라 독일어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파울 첼란이 생각났다. 독일어는 그의 모어였다. 식민지국 작가들이 겪게 되는 고충을 느낄 수 있었다.

7장 '세계적 글쓰기'는 오늘날의 작가들이 세계 독자에 다가가기 위해 시도하는 다양한 글쓰기 방법론들을 소개한다. 그들은 탈지역화된 방식을 채택하고 (프란츠 카프카, 보르헤스, 베케트) 글로컬적 전략으로 글을 쓰고 (키플링), 글로컬리즘 방식을(오르한 파묵) 고수한다. 어떤 방식을 채택하든 전 세계의 독자를 염두한 글쓰기일 것이고, 작가들은 전 세계의 자산이 우리의 유산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의 원형을 찾아 4천여 년의 시간 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읽고 쓰는 일, 그 일은 분명 우리를 더 나은 인간이 되게 해 준다고 믿는다. 댐로쉬가 예시로 소개한 텍스트 중 읽지 않은 작품들이 많아 이해가 쉽지는 않았다. 폭넓게 읽기와 깊이 읽기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작품을 읽더라도 그 작품에 한정해서 이해하는 습관도 고쳐야 할 것 같다. 날마다 쏟아지는 책, 그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를 고민하는 이에게 댐로쉬의 책은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 믿는다. 댐로쉬와 다른 견해를 가진 프랑코 모레티의 '멀리서 읽기'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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