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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남편의 외도로 결혼 생활이 끝나 삶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여성이,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삶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여성을 만난다. 배신의 고통을 환기시키기 위해 노인들의 부고를 작성해주는 화자에게 ‘목미란’이라는 이름으로 요양병원 치매병동에 있는 92세로 추정되는 이 여성은 자신의 삶을 기록할 단어들로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그리고 어머니를 꼽는다. 그녀의 이야기는 20세기 한반도 역사를 모두 담고 있으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고, 잔인하고, 강렬하다. 영화로 만들어진대도 3부작인 되어야 할 듯한 그녀의 이야기는 사실일까? 아니면 한 치매노인이 자신의 마지막 순간 지난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각색하고 싶어서 하는 거짓일까?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는 할머니의 고백이 요양병원 비서의 손을 거쳐 다시 쓰이는 과정을 거쳐 편집되고 각색된 만큼 진위 여부를 따져보는 것은 의미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한국의 역사 속에서 일제 강점기에 차출을 피하기 위해 여자들은 급하게 결혼해야 했고, 그럼에도 위안부로 납치되어가 착취당한 여성들이 있었으며, 패전 후 흔적을 지우기 위해 학살당했다. ‘정중한 전쟁’인 6.25 전쟁에서 피난민들은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떠돌아다니며 매순간 ‘우리’가 누구 인지를 선택해 목숨을 하루씩 더 연장해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정의로운 영웅의 모습을 한 미군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인종을 가리지 않고 치부가 있다. 타국에 의해 상처 입은 우리 국민이지만, 우리는 그들을 품어주지 못했다. 우리가 미처 들어주지 못한 이야기를 삶의 마지막 순간의 노인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고발하고 있고, 누구보다 배신과 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한 여자가 그 목소리에 확성기를 대어 증폭시키고 있다.
이 소설은 작가의 말에서부터 읽을 필요가 있다. 작가가 미국 대학에서 공부할 때, 한 교수가 소설쓰기로 먹고 살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첫 장편을 억대 선인세를 받고 미국의 거대출판사 중 하나인 하퍼에서 출간하게 되었다. 그렇게 영어로 먼저 출간된 소설은 세계의 많은 독자들이 읽고 있다. 작가는 영어로 소설을 쓴 이유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며 스티븐 킹의 말을 인용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영어로 쓰여진 건 어쩌면 앞서 말한 교수처럼, 우리에게 한계를 지으려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반기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가능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을 알리고자 영어로 쓰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더욱 이 할머니의 마지막 고백이 사실인지를 의심하는 것보다 그녀들의 말에, 그 많은 이름들에게 일어났던 일에 경청해야 할 것이다.
소설 속에서 여러 번 언어가 가지는 힘과 능력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언어는 정체성의 출발점이 되고,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수단이 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언어를 통해 소통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아 교집합을 만들 수 있게 한다. 그동안 미처 포용되지 못한 이름이 지워진 여자들의 고통에 대해서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물론, 내면에서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흙 속에 묻혀 있던 역사의 상처들이 주목을 받게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