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청중의 탄생 - 청중의 자리에서 본 클래식 신화의 탄생과 해체
와타나베 히로시 지음, 윤대석 옮김 / 강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거의 캄캄할 정도로 낮은 조도로 뒤덮인 객석과 밝지만 은은한 색상의 조명으로 뒤덮인 무대. 무대 위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제각기 음을 맞춰보면서 특유의 음의 혼돈을 연출한다. 이윽고 단원들도 조용해지고, 지휘자가 나타나면 웅성거리던 청중들은 말을 멈추고 박수를 친다. 지휘자는 인사를 한 후, 두 손을 들고 오케스트라를 향해 첫마디의 시작을 알린다. 이후, 청중석에 앉은 사람들은 몸을 움직이거나 말을 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어쩔 수 없이 재채기나 기침을 할 때조차 아주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청취를 방해하는 일이니 말이다. 연주홀 안의 모든 시설들은 오로지 무대 위에서의 연주에 집중하도록 짜여져 있다. 관객들은 주위의 다른 관객들이 아니라 오로지 연주만에 집중해야 하고, 따라서 예술작품과 오로지 개인으로서만 만나야 한다. 이 때 예술작품은 거의 경모되는 어떤 것이다.

청중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상당히 어려운 적응과정을 강요한다.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문화적 수준과 소양이 낮은 사람으로 폄하되고, 다른 청중들의 깔보는 듯한 찌푸린 눈길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수용방식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고, 오히려 극도로 인위적이다. 특수한 관계방식에 대한 정보와 훈련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편할 수 없는 것이 청중의 '바람직한' 태도다. 이 '바람직함'은 대단히 위계적인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다. '고급' 문화에 맞는 태도방식에 대한 익숙함은 하나의 신분적 표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청중에 대한 이런 '훈육'은 왜, 어떻게 가능해진 것일까?

근대적 의미에서의 예술, 다시 말해 예술외적인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자적인 목적을 지니는 고유한 영역으로서의 예술이 성립된 시기는 대체로 18세기 말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예술이 수공업적 기술과 구별되어 다른 보다 높은 정신적 가치를 지니는 영역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더 이전인 르네상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좀 더 정밀하게 따져보면 고대에도 이미 예술이 단순한 수공업과는 달리 좀 더 고급의 인간능력의 산물로 취급되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술이 사회적인 규모에서 도덕, 학문, 교육, 종교 등이 부여하는 과제로부터 놓여나이런 음악의 수용양식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니, 극히 인위적인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위 '자율적'인 영역으로 성립되고 제작, 수용되기 시작한 것이 18세기 말이라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이론이 없다.

이렇게 예술이 자율적 영역으로 성립되면서 예술의 산출과 수용의 양상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에는 공동의 모임에서 소리내어 읽던 독서는 이제 개인의 묵독으로 바뀌었고, 주로 시장에서 저급한 오락의 기능을 담당했던 연극은 극장 안으로 들어와 소위 '제4의 벽'을 구축하여 집중적인 관람을 가능하게 했다. 미술 역시 미술시장 및 미술관의 성립과 더불어 종교적, 세속적 과제로부터 벗어나 미적 가치 자체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과정에 음악에서는 어떻게 일어났으며, 최근에는 또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상술하고 있는 책이다.

매우 대중적이며 쉽게 쓰여져있는 이 책은 근대적 청중의 성립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된다. 이 청중이 성립되기 이전, 음악은 다른 예술장르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실용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데 사용되었다. 교회에서 신앙심을 키우고, 귀족들의 파티에서 흥을 돋우고, 춤을 반주하고, 식욕을 돋우고, 귀족들을 칭송하는 것이 음악이었다. 그러나 음악회라는 것이 성립된 후에도 한참동안 음악회는 일종의 파티이자 사교의 장이었다. 청중들은 적어도 음악에 대해서만큼이나 주변의 관객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문학과 달리 감각적 소재만을 취해야하는 음악은 모든 예술 장르들 가운데 가장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대표적인 예가 칸트다. 칸트에게 음악은 정신성이 결여된, 단순한 쾌적함만을 제공해줄 뿐인, 따라서 가장 저급한 예술이었다.

18세기 말 이후 음악은 이러한 관념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음악을 정신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소위 '진지파'가 기존의 '오락파'에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탁월한 음악가들은 '거장'으로 숭배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음악 자체도 고급음악과 저급음악으로 갈라졌고, 저급음악으로 분류된 음악은 차츰 콘서트홀에서 배제되었다.

'진지파'들은 음악이란 감각적 음의 향유가 아니라 음악의 구조적 측면을 읽어내어 이로부터 어떤 정신적 의미를 간파해내는 작업으로 간주했다. 음악에서 음은 이제 단지 표면만을 구성할 뿐이었고, 그 배후의 정신성만이 진정하고 품위 있고 고상한 향유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렇게 '거장'에 의해 창조되어 '진지하게' 수용되어야 하는 음악에 대해 청중은 숭배와 경건의 태도, 즉 거의 종교적인 태도를 보여야 했다.

저자는 이러한 음악의 수용방식이 1920년대에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벤야민이 지적했듯, 예술복제시대가 시작된 것인데, 음악에서는 축음기, 라디오, 재생피아노 등이 새로운 '하이테크' 매체로 등장한 것이다. 이로써 음악은 한결 더 접근성이 커졌으며, 음악의 신전이라고 해야 할 콘서크홀을 빠져나와 언제 어디서나 수많은 대중에 의해 청취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음악이 일상에서 격리된 위상을 벗어나 다시 일상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 더욱 강화되었다.

이제 음악청취는 완성된 작품의 참된 의미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무수하게 다양하게 연주될 수 있고, 일체의 규범적 수용방식을 벗어난 자유롭고 개인적인 향유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된 상업화의 경향이 음악계에도 침투하여 음악은 그 자체로서 고급스런 광고의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일상을 장식하는 소품이 되기도 하고, 영화의 한 요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19세기의 진지파가 주장했던 '순수관조'의 수용방식은 다시 해체되어 그 이전의 실용적 음악관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음악은 소수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의 라이프스타일의 일부로 간주된다. 자율적 예술은 다시 오락과 유희의 대상으로 대중에게 돌아오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음악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가역적인 포스트모던한 경향이다.

대강 이런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자율적 예술의 성립과 해체의 과정 자체는 그간 많이 논의된 바 있으므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책에서는 그 과정에 음악의 수용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났는지를 매우 흥미롭고 전형적인 사례들을 통해 확인해보는 재미가 있다. 저자의 필체는 매우 평이하며, 독자를 가르치려 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성실한 탐구결과를 짜임새 있게 보고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많은 정보를 취하면서 재미도 느낄 수 있으니, 좋은 대중서가 갖추어야 할 미덕들을 다 갖추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물론 자율적 예술이 불가역적으로 해체되고 있다는 저자의 견해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오히려 더 불가역적이었던 것은 자율적 예술의 성립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자율적 예술의 성립 후에도 타율적, 실용적 예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술시장을 양적으로는 언제나 지배해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래에 클래식 음악이 전통적인 장을 벗어나 다양하게 활용되고 다양한 수용방식들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고 해서 자율적 예술의 장 자체가 와해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저자는 이 책이 발표된 지 7년 후에 덧붙여놓은 후기에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표명하고 있다. 이 책의 초판이 1989년 발표되었으니, 포스트모던이 마치 세상을 뒤바꿀 것이라는 과장된 생각이 한참 지식계를 강타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 당시의 성급한 흥분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상의 유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잘 정리하여 전해주는 구체적 정보들의 가치는 손상되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아가 예술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