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2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책읽아웃-삼자대면'에서 소개하던 걸 듣고 꼭 읽어보고 싶다고 장바구니에만 넣어놓고 있다가 우연히 선물 받은 김에 읽기 시작해 크리스마스 즈음 완독. 588페이지나 되는데도 지루할 틈이 없게 빠르게 읽고 다음 페이지가 궁금했던 인생 소설! 프랑스에선 문학상을 여러 번 수상한 작가이지만 한국에 번역된 건 이 소설뿐이라 아쉽다. 단문 위주의 짧은 문장 사이의 행간에 숨은 깊은 감정과 생각들이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이렇게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들어낸 이야기인데도 마치 실존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와 가슴을 적시고 마음을 움직인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담긴 이야기로 정의한다면 식상하게 들리겠지만, 비올레트라는 인물은 식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아빠가 누구인지 모르고, 태어나자마자 엄마에게 버려져 라디에이터 위에 올려져 있던 아이가 위탁가정을 전던하며 성장하고, 십대에 투생이라는 나쁜 남자를 만나 불같은(아, 식상한 표현)을 하고, 레오닌이라는 아이를 낳고 완전히 달라진 생에 흠뻑 빠져 진정한 행복을 느꼈던 그녀. 누군가의 무지가 재앙이 되어 딸을 잃게 된 사건 이후로 겪어야 했던 깊은 상실과 공허의 상태를 묘사한 부분이 절절해서 애처롭고, 그걸 극복하게 해준 브랑시옹엉살롱 묘지지기 샤샤와의 만남은 기적과도 같았고, 딸의 생전에 우연히 베푼 호의를 계기로 인생의 절친이 된 셀리아를 비롯한 등장하는 인물마다 그만의 개성과 빛을 발하는 이야기.
어머니의 일로 묘지지기의 집을 찾아왔다가 비올레트의 운명적인 사랑이 된 쥘리엥과의 만남들은 서로의 상처와 속 깊은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는 장면을 질재하는 두 인물의 이야기인 듯 생생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그의 일곱 살 아들 나탕도 너무 사랑스럽게 그려지고. 중년의 나이에 연하인 남자와 장거리 연애는 실현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해버리고 선을 그었지만 내심 계속 그를 기다리던 비올레트의 마음이 애닳고 안타까워서, 또 좋은 순간들에는 뭉근하게 따뜻한 설렘도 느껴져서 더 몰입해서 읽었다. 얼마나 푹 빠져 읽었으면, 본가에 처음으로 김장을 도우러 내려가던 차 안에서 최애 조카에게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읽고 싶다고 하기도 했다. 비올레트가 겪은 아픔을 겪고 싶지는 않아도 그녀만의 개성,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긍정할 것을 찾아내는 밝고 강건한 마음은 닮고 싶다. 장미향을 좋아하는 캐릭터로 나오는 그녀가 즐겨 쓴다는 향수 아닉 구딸도 검색해봤는데 같은 이름의 향수도 없어서 샘플러를 사보기도 했다. 그래도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쓴 향수와 같은 브랜드를 써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을 만난다는 건 참 드문 일이라 선물 같은 일!
절대로 치유될 수 없을 것만 같던 상처를 보듬어준 마르세유의 여름 바다에 비올레트가 담갔던, 겨우내 언 발 같은 마음과 몸이 뭉근하게 데워지는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 이 소설은 딱 요맘때쯤 읽으면 좋을 듯하다. 뱅쇼나 다른 계절 와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