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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끝에 서다 1
고영일 지음 / 새만화책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겪은 90년대 후반은 포스트모던하고 욕망이 들끓던 취기가 만연한 시절이다. 온갖 목소리들이 이리저리 모아지지 않은 채 분출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의 모양새를 찾아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90년대 후반, 누군가에게 닥친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고 감당할 수 없는 폭력, 군대와 군대내에서의 국가보안법, 이 10여년을 뛰어넘은 회고가 만화에 담겨있다.
시간을 두고 다시 살펴본다는 것, 그것도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살펴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이 만화에 점수를 주고 싶다. 그 시간이 주는 장점이 만화에 생생이 살아있다. 분노, 당황, 악 소리가 생생하게 펼쳐져있지 않고 성찰의 끈기, 솔직한 반추의 고통과 더불어 묵직하게 우리의 마음을 두드린다.
하루하루 말도 안되는 퇴행 짓거리들을 보고 들어야하는 2009년 어쩌면 이 만화의 출간은 그야말로 시기적절하다고 해야할까. 우리 사회가 바뀌기 위해서는 군대, 학교 이런 곳들이 근본적으로 방향을 선회해야하며 그러지 않고는 언제고 이런 말도 안되는 황당한 일들이 티비와 신문을 장식할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군대경험이 없는 나는 아 군대라는 곳이 이런 곳이구나, 정말로 이런 곳이구나를 실감하고, 그 안에서 자잘한 혹은 커다란 굴복의 경험들이 사람을 어떻게 왜소하게 비참하게 만드는지를 대리체험한다. 그리고 내가 사회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겪는 강도는 약하지만 본질은 비슷한 그런 경험들을 떠올린다.
나이와 시간이 그저 젊음을 밀쳐내는 악인의 얼굴만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 만화를 통해서도 느껴볼 수 있다. 물론 그저 시간을 보낸다고 우리가 성숙할 수는 없다. 어떤 경험이건 어떤 기억이건 그것을 돌아볼 수 있다면, 다시 성찰해낼 수 있다면 나이듬이라는 것이 또다른 지혜를 줄 수 있을것이다.
군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진한 공감과 반추를 선물해줄 책이다. 군대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미 유사 군대인 학교와 사회를 경험하고 있기에 충분히 공감이 가능하다. 불안과 당혹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독방에 갇혀서 [남들은 개인의 자유와 포스트 모던을 노래하면서 흥청거릴때..] 저 높은 작은 쪽창문이 드리워준 햇살 두 조각이 벽 모서리에 접힌 채 이쪽에서 저쪽으로 지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그 진한 시간감각, 머릿속의 온갖 생각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던져준 빵과 요구르트가 속절없이 달기만 해서 꺼이꺼이 울어야하는 우리 인간의 몸, 던져 버릴 수 없는 어떤 끈적한 질기고도 질긴 삶의 속성이 어디에서도 우리 몸에 남아 있다는 어떤 징그러움... 만화를 읽으면서 소름이 돋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어떤 글보다도 진하게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