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까닭을 묻다 -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 만난 하나님
김기현 지음 / 두란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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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의 믿음이란

인간의 삶에는 항시 고난이 함께 한다. 저자는 ‘산다는 것은 고난받는다는 말과 같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고 한다.(6p) 나와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로서의 고난도 있지만, 욥에게 그러했듯 이유 모를 고난도 있다. 모두에게 고난이 있지만, 모든 고난은 같지 않다. 내가 겪는 고난이 하나님 안에 있기를 소원하는 이라면, 그 고난이 하나님 앞에 해석되길 바라는 이라면 이 책을 집어들길 추천한다.

욥은 아무런 잘못 없이 모든 것을 잃었다. 재산, 사랑하는 자녀들, 건강, 이 모든 것을 잃은 그는 하나님께 따지고 묻고 심지어는 개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냐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자신을 죄인 취급하지 말라며 반복하여 묻고, 따진다.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와 ‘너의 고난의 네가 죄인이기 때문이지, 감히 하나님께 그런 망발이냐’라며 고난을 당하는 이유와 마땅히 그가 취해야 하는 태도에 대해 신학적으로 꼬집고 설명하지만, 욥의 태도는 일관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고난받는 것은 뭔가 잘못된 일이란 거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욥이 묻고 따지고 개긴 시간들을 신앙으로 보신다. 세 친구에게는 분노하시고, 욥은 옳다 하시는 하나님의 판결 앞에 질문이 생긴다. ‘무엇이 신앙인가?’ 욥기의 주제는 ‘까닭 없이 믿을 수 있는가’(36p)라고 하는데, 모든 축복이 거두어지고 고통에 처한 욥의 발광에 가까운 울부짖음이 ‘까닭 없이 믿는 믿음’인 것인가? 무엇이 믿음이고, 무엇이 신앙일까?

그토록 대답을 구하던 하나님이 나타나셨음에도 욥은 뾰루퉁하다.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는데도 속 시원히 해결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도 그가 뱉었던 말들에 분노하시고. 화내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그의 모습들을 모두 당신을 향한 신앙으로 보신다. 곧 그분과 관계하는 것이 신앙이며 믿음 아닌가. 세 친구들처럼 ‘옳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 즉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는 고난을 통과하고 견디며 하나님을 놓지 않았고,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개겼다. 그 모든 것이 신앙이었다.

욥기를 따라,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불편한 진실을 만난다. 그것은 바로 내가 욥의 친구들과 닮았다는 것이다. 때로 난 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욥의 친구들이기도 하다. 세 친구들의 말은 어느 것도 틀린 것이 없는 ‘옳은 말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욥에겐 ‘옳은 말’이 아니었다.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절대적 옳은 말’을 해왔을까, ‘그에게 옳은 말’을 해왔을까? 자문해본다. 부디 내가 하나님과 관계하는 욥인 동시에, 형제자매와 하나님 간의 관계를 보는 이가 되길 기도한다.

10여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모든 관계를 놓을 수밖에 없을 만큼 고통에 처한 적이 있다. 원흉이었던 그 자식 욕을 수없이 했다. 대학에 와 새로운 공동체를 만나고 나눔을 빙자한 욕들을 수년을 쏟아놨다. 그 때에 필립얀시의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를 읽고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인데, 어쩔건데?’라는 부분에서 전부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어느 정도 감정의 해소를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자식이 꿈에 나왔다. 깼는데, 하나님이 용서하고 연락하라시는 것 같았다. ‘어차피 영영 볼 일 없고, 10년이 훌쩍 지났는데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니 그보다 그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이 왜 그런 마음을 주신지 알 것 같다. 어쩌면 나도 그에게 ‘그 자식’이었을 테고, 사탄이고 리워야단(책 참조)일 수 있었다. 나로 인해 그가 겪었을 고통이 보였다. 저자는 나의 고통 외에 다른 이의 고통이 보이는 때가 고난의 연대기가 끝나는 시점이라고 한다.(208p) 어쩌면 덮어두고 찍지 못했던 고난의 마침표를 찍게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의 흉터를 보듬으시고, 아름답게 빚으시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인생이 이어지는 한, 고난은 계속 함께할 것이다. 때로는 어떤 고난이 올까 두렵다. 이 책은 그 두려움보다도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나는 욥일 수 있을까?’, ‘고난을 지나며, 인생을 살며 하나님께 묻고 따지고 때론 개기며, 그렇게 하나님을 부여잡는 신앙인일 수 있을까?’ 라고 말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다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의 우주적 그림 앞에, 이해되지 않을 고난들을 삼키며 그분을 부여잡고 끝까지 살아낼 수 있을까? 자신은 없지만, 자신할 수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이유 모를 고난을 지나신 하나님, 십자가의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본다. 왠지 그분께서 나를 끝까지 도우실 것 같다. 고난 중에 당신을 붙잡도록, 고난을 당신 앞에 두고 씨름하도록, 당신 앞에서 해석하도록, 당신의 뜻대로 빚어지도록 도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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