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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와의 대화
로저 파우츠. 스티븐 투겔 밀스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9월
평점 :
2011년 개봉한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침팬지는 ‘미지의 약의 도움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의 지능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학대한 인간에 반기를 들고 안식처를 찾아 떠나게 된다...
아마 내가 영화를 보기 전에 로저 파우츠의 이야기를 먼저 접했더라면 영화를 보면서 ‘약이 없어도 그들은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고 있어’, ‘침팬지를 과소평가 하는군’이라며 코웃음 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로저 파우츠가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들의 안식처를 보호해주는 수문장이 되었을거다.
책 ‘침팬지와의 대화’는 단순한 침팬지의 의사소통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침팬지의 언어능력에 대한 연구를 계기로 맺어진 워쇼와 로저 파우츠의 따뜻한 드라마이자 가족이야기, 현실에 맞선 스릴러이면서도 경종을 울리는 고발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평생을 거쳐 하고 싶었던 침팬지 워쇼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침팬지 전체에 관한 이야기가 할머니가 주신 공기밥처럼 꾹꾹 눌러 담겨져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로저 파우츠의 워쇼에 대한 사랑으로 엮어져 있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푸근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는 Next of Kin, 번역하면 ‘가까운 친척’이다. 저자는 침팬지를 늘 가족으로 대했고, 침팬지를 향한 그의 애정은 인간 가족을 향한 것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로저 파우츠는 책을 통해서 침팬지가 인류의 가장 가까운 친척임을 알리기 원했다. 지구 상에서 인류와 가장 가까운 존재는 침팬지임을, 그들은 우리와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들은 학대받거나 멸시되어선 안될 존재임을 알리기 위해 저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책에 쏟아 부었다.
로저 파우츠는 책에서 침팬지와의 개인적 교감을 통해 따뜻한 오빠 혹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때로는 냉철한 과학자로서 인간만을 우월시 하는 이론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 후에는 뜨거운 운동가의 모습으로 침팬지의 권익을 위해 두 팔을 걷어올린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 그리고 워쇼와 함께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워쇼의 익살에 나도 웃음을 터뜨리고 다른 침팬지들의 비극에 함께 침울해지기도 한다. 마침내는 그들의 희망을 간절히 응원하게 된다.
인간은 그동안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였는가. 우리만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의 희생을 강요해 왔는가.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내부인과 외부인 - 이 경우, 인간과 침팬지라는 두 종 - 의 임의적인 구분을 바탕으로 하는 도덕률에 따라 살고 있다.
- 침팬지와의 대화 중
저자는 인간의 편협함에 날카로운 일침을 날린다.
어쩌면 나 역시 비슷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의 공감능력은 동물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능력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워쇼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캣은 워쇼가 새끼를 두 번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워쇼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캣이 워쇼에게 수화로 말했다. <우리 아기가 죽었어.> 워쇼가 고개를 숙여 땅을 보았다. 그런 다음 고개를 들고 캣의 눈을 보면서 눈 밑 뺨에 손을 대고 수화로 <운다>고 말했다.
..(중간 생략)..
그날 캣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지만 워쇼는 캣을 놓아 주려 하지 않았다. <제발 사람 안아 줘.> 워쇼가 수화로 말했다.
- 침팬지와의 대화 중
재미있는 건 생각이 바뀌고나니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창피하거나 불쾌하지 않다. 모든 침팬지들이 친구가 되어 든든해진 느낌이다. 저자가 침팬지들을 만난 후 얻은 것도 바로 이런 것일까. 아마 단순히 과학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다윈이 옳으냐 데카르트가 옳으냐의 탁상공론은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다. 워쇼와 로저는 그들의 삶을 통해 두 종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로저 파우처의 ‘침팬지와의 대화’
교과서 이상으로 유익하면서도 왠만한 영화보다도 흥미진진하다.
하드커버로 정성스레 엮인 책의 겉모습만큼이나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