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믹 잭팟 - 폴 데이비스의 우주론 강의
폴 데이비스 지음, 이경아 옮김 / 한승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저자인 폴 데이비스가 인생을 통해 궁구해 온 우주론의 정수라고나 할까.


우주를 설명하는 데 있어 '거북 탑'과 같은 무한의 퇴보를 피하려면 과학적 설명에서조차 믿음에 근거해 받아들일 무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최대한 단순해야 한다. 


물리학은 관측자 참여를 만들어낸다. 관측자 참여는 정보를 만들어낸다. 정보는 물리학을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우주는 관측자를 설명하고, 관측자는 우주를 설명하는 셈이 된다. 


유무(有無)란 본래 구분할 수 없는 개념이다. 완전한 유 혹은 완전한 무를 물리적으로 구체화하는 건 어렵다. 기껏해야 수학적으로나 (그것도 정의나 약속에 의해서만이) 관념적으로 상정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결국 존재란 무시무종이요 원인-결과의 영원한 순환이요, 그래서 결국은 ‘항상 그러할 뿐인, 여여(如如)할 뿐인, 표현할 수 없는 지금 여기 이것’이다. 


대부분의 우주학자들은 양자적 다중우주를 지지하면서도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양자적 다중우주에서) 생명체가 있는 우주를 얻기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막대한 수의 죽은 우주인 셈이다. 


글쎄, 사사무애 도리로 보면 모든 양자우주가 일종의 다수결을 통해 ‘주류’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존재는 양자우주 속에서 무수히 존재하지만 다수결을 통해 지금, 여기의 나를 "Main Me"로 설정하여 꾸려가는 우주적 History를 써가고 있는 것 아닐까? 


존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결국에는 지금까지 논의한 모든 접근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으로 밝혀질지도 모른다. 실상은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이들 접근(①우연에 의해 생명체를 허용하는 유일한 우주, ②이유도 없이 존재하는 엄청난 수의 또 다른 평행우주, ③자기 설명적이며 모든 존재보다 앞서 존재하는 신, ④역행하는 인과율과 목적론을 수반하면서 관측자가 있는 자기 창조적이고 자기 설명적이며 자기 이해적인 우주) 모두 저자에게는 아주 우스꽝스럽거나 불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인간이 지닌 이해력 한계로 설명되는 근원적인 난국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 우리의 정신은 유전자와 문화자(meme)의 산물이다. 


저자는 인류가 우연한 자연 작용의 우연한 부산물 그 이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체와 정신이 희미하고 어렴풋이 감지된 생명체 원리를 통해 우주의 구조에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아마도 우주는 생명체인 관찰자를 탄생시키기 위해 시작되었고, 관찰자의 의식은 다시 새로운 우주를 시작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