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지상에서의 완벽한 사랑이 있는가?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책의 맨 앞에 있던 한 문장이었다. 성격에 있는 구절이라고 한다.
왜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일까?
저 구절은 책에 나오는 두 남녀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들의 인생의 목표인, 인생의 궁극적인 도달점이고자 했던 좁은문. 그 뒤의 세계는 어떠했을까? 
  
  


 

 

  
 
지상에서의 
완벽한사랑이 있는가?

  
-민정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책의 맨 앞에 있던 한 문장이었다. 성경에 있는 구절이라고 한다.
왜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일까?
저 구절은 책에 나오는 두 남녀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들의 인생의 목표인, 인생의 궁극적인 도달점이고자 했던 좁은문. 그 뒤의 세계는 어떠했을까?

  



1. 펭귄클래식 좁은문에 들어가기 전, 

아름다운 여인에 시선을 뺏기다.


 사실 난 펭귄클래식의 좁은문을 읽을 때 왜 표지앞에 이런 매력적인 여자의 뒷모습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책의 디자인을 였을까? 표지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서 펭귄클래식의 좁은문을 읽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아니면 혹 책의 중간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 표지의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기 전에 궁금하신 분들은 다음 부분을 드래그 해주시라. ▶▶▶(주관적인 나의 생각이지만) 여인의 뽀얀 등 위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목선은 여자인 내가 보아도 아름다웠으며, 혹 남자가 봤다면 (약간 위험한 발언이지만....) 목걸이를 차려고 하는 여자의 목선만 봐도 이 여자를 탐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왠지, 좁은문 위에 있는 이 여인은 함부로 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그림에서 느껴진다. 참 묘한 느낌이다. 아름답지만 탐할 수 없는 존재. 바로 소설에 나오는 알리사, 그녀가 표지의 모습처럼 있었다면 목걸이를 거는 것만 도와줄 뿐 분명 그녀를 돌려세워 탐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 만약 내가 주인공 제롬이었다면 말이다. 참 슬픈 사랑이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의 모습을 육체적이 아닌 정신적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말이다. 분명 주인공 제롬은 그것이 힘들었을 테니. 소설을 읽고 제롬의 입장으로 이 표지를 본다면, 분명 이 표지의 의도를 느낄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2. 상처받은 영혼의 사랑.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의 가치관은 상처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아니라 어떻게 보자면 상처받지 않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하게 되었다. 분명 상처받지 않고자 생긴 가치관은 무언가의 집착, 일반이라고 생각되는 것과는 다른것에 의지로 변하게 된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알리사는 참 이상한 여자-답답한 여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리사는 분명 현실에서도 있는 여성일 수도 있다. 바로 지금 이 시대에서 말이다.
알리사의 가정은 행복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불륜에 빠졌기 때문이다. 알리사는 그런 그녀에 대한 실망감을 가지고 있었고, 분명 큰 충격을 받았다. (정서적 불안에 시달리는 알리사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가출로 인해 무기력해진 아버지를 보면서도 실망감을 느꼈으리라. 불안정한 가정에서 생겨난 그녀의 사랑에 대한 가치관은 분명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내 생각에 그녀는 완벽한 사랑을 하고자 한 듯 하다. 대게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예를 들면 부모의 이혼, 부모님의 불륜으로 인한 가정파괴) 자신이 그 부모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상처로 인해 생긴 강박관념은 다시 상처받지 않고자 하는 완벽한 사랑을 추구했던게 아닐까. 그녀는 신앙심 만이 자신이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이라 믿었고, 변하는 사람과의 사랑보다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 훨씬 변하지 않는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님과 아버님을 보면서 지상에 대한 사랑에 회의를 느낀 그녀는 천상의 사랑에 관한 Perfect한 판타지가 있었을 것이다. 신앙은 변하지 않기에, 성경의 하나님은 변하지 않기에 그녀는 신앙에 절대적으로 자신을 맡겼으며 아마도 그녀는 변하는 사랑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녀가 완벽한 사랑을 이루는 방법은 광적인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 이었다. 사랑에 많이 실패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완벽한 사랑에 이르기란 참으로 힘든 것이다. 게다가 좁은문이라니?
  여기서 조금 더 답답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알리사 뿐만 아니라 제롬마저 그녀와 같은 사랑의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알리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했다. 제롬도 그가 살아온 삶에서 구원받을 수단이 알리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무튼 그들은 편지로 서로 이야기를 나눴으며 알리사가 죽을 때까지 서로 육체적으로 함께이지 못했다. 원래 여자가 좀 빼주면 남자가 들이대야 뭐라도 성사되는 법인데, 제롬은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성스러운 사랑이었으니까. 마지막순간까지도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만큼 사랑의 크기도 크다고 생각했던걸까? 제롬이 알리사의 손을 잡고 좁은문이 아닌 더 큰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자 라고 말했다면 소설의 결말은 어떻게 변했을까?
  



3. 쥘리에트의 외사랑은 결혼으로 끝을 본 것일까?


  소설에서 쥘리에트의 역할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쥘리에트가 없었다면 제롬의 솔직한 마음을 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앙드레 지드는 쥘리에트를 통해 독자에게 제롬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쥘리에트의 그 역할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충실하다.
  하지만 왜 쥘리에트를 통해서 제롬의 마음을 들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쥘리에트가 제롬의 마음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니와의 사랑을 후회하는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제롬은 쥘리에트에게 올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희망이라도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와의 사랑이 결코 후회스럽지 않았다는,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성스러운 사랑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하는 제롬의 결정에 그녀는 마지막에 좌절감을 느낀다. 그것은 마지막 장면의 쥘리에트가 비틀거리며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깨어나자”라고 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그나마 이 소설에서는 쥘리에트가 가장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을 통해서 본다면, 그녀는 결혼 후에도 계속 제롬을 사랑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해설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쥘리에트의 사랑 또한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나 나는 결말의 끝에 그녀의 “깨어나자”라는 대사를 보면서도 그녀의 사랑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내가 너무 잔인한걸까.
  



4.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서와 좁은문 
- 지상에서의 완벽한 사랑 - 삶 - 이 존재하는가?


 

  좁은문을 감명 깊게 읽은 사람이라면, 쉘 실버스타인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추천한다. 귀여운 삽화와 함께 간략하지만 큰 교훈을 주는 소설이다. (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글을 쓴 사람이 쓴 소설이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서 인터넷으로 감상하실 분은 이곳으로...
출처는 http://blog.daum.net/losfeliz/14654091)

 
  잃어버린 조각을 찾는 동그라미와, 알리사가 추구하는 목표는 매우 흡사하다. 자신의 일부분을 잃어버린 동그라미는 그것을 찾기위해 여행을 한다. 여행을 하면서 동그라미는 곤충과 꽃 등 여러 가지의 것들과 대화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잃어버린 자신의 조각을 찾는다. 동그라미로써 완벽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각을 찾고선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대화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그라미는 그러한 것에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다시 조심스럽게 잃어버린 조각을 내려놓은 후에, 노래를 부르면서 다시 여행을 한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기 위해서 -
  뭔가 해탈한 듯한 불완전한 동그라미처럼 알리사가 완벽함을 추구하는 삶 자체를 기쁘게 여겼다면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들어갈 수 없었던-제롬을 사랑하기에 완벽한 신앙을 꿈꾸면서도 결국엔 둘다 완벽하게 하지 못했던- 좁은 문을 들어가려고 했기에 힘들었던 것이다. 그녀가 좁은문을 통과해 그녀가 꿈꾸는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구절처럼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기만’ 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그 힘쓰는 과정속에서 자신의 상처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알았을 것이고, 제롬이라는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과 조화롭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좁은 문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생에서 꼭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도. 바로 완벽한 사랑-완벽한 삶-은 없다는 것. 그래 없다. 그렇게 보이는 사랑과 삶이 있을 뿐이다. 사랑을 함에 있어서도 완벽한 사랑을 하려고 하면 소중하거나 행복해질 수 있는 많은 기쁨과 같은 것들을 지나치게 되거나 발견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잃어버린 조각을 찾고 완전체가 된 동그라미처럼. 그리고 결국엔 일기장을 통해 불완전함을 고백한 알리사처럼. 여러번의 사랑을 통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것은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불완전한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를 매꿔주고 또 비어있는 부분을 매꿔주고 매꿔주는 그 순환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한 사랑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진실된 사랑을 찾으려고 하자. 만약 알리사가 신앙보다 더 큰 사랑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깨달고 자기 자신을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진실 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제롬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알리사에게 서로를 향한 사랑에 대해 거부하지 말자고 말하며 손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분명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상처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좁은 문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완벽한 사랑은 없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바로 제롬과 알리사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과정을 보면서 말이다.
  소설을 읽고 난 후,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좁은 문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좁은 문과 그 주위의 풍경은 어떤가? 난 시커먼 어둠속에 홀로 빛나는 좁은 문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좁은 문을 제외한 나머지 풍경은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만약 알리사와 제롬이 좁은 문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좁은 문을 둘러싼 풍경이 꽃으로 둘러싼 정원이 있거나, 새들이 지저귀거나, 아이들이 뛰노는 장면 등의 화사한 이미지로 생각됐을지도 모른다.
 혹 앙드레 지드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갈망했던 완벽주의자는 아니었을까? 혹 그도 나의 좁은문에 대한 이미지처럼, 주위의 모든 것이 새까맣고 좁은문만이 빛나는 삶은 살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 펭귄클래식 코리아는 좁은문에 대한 감상을 고조시켜..
  좁은 문은 어렸을 적 한번 읽었던 소설이다. 사실 줄거리는 가물가물 했지만 읽고 난 후의 센치한 그 느낌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펭귄클래식을 통해 좁은 문을 제대로 감상하게 되었다. 그 감상의 시작은 표지와 서문, 소설의 내용, 작품해설의 과정으로 쭉 이어지며, 어느 것 하나 감상을 방해하는 요인은 없다. 책의 껍데기부터 이미 좁은 문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흠뻑 감상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좋은 책의 브랜드를 알게 된 기쁨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다가 가볍기까지 해서 틈틈이 읽는 데 아주 좋다. 아무튼 책을 덮고 난 후에 표지를 바라보는 그 느낌은 말로 할 수 없다. 그러니 만약 좁은 문을 제대로, 제롬과 알리사의 서로에 대한 사랑의 몸부림을 제대로 느끼고 싶으신 분이라면 펭귄클래식 코리아의 브랜드를 선택하길 바란다. 나는 감상에 있어서 아주 도움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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