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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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의자만 뒤로 계속 물리면 하루 종일 석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너와 나는 이 별의 반대편에 집을 짓고 산다.

내가 밤이면 너는 낮이어서

내가 캄캄하면 너는 환해서

우리의 눈동자는 조금씩 희미해지거나 짙어졌다.

우리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 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어느 날 이 시를 읽다 문득, 작년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됐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의 글이 떠올랐다.


'해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장미 옆에서 가로등을 켜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왜 슬픈지 캐묻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은 게 마흔세 번째인지 마흔네 번째인지 추궁하지도 않고, 1943년 프랑스 프랑의 환율도 물어보지 않는 어른이고 싶다. 그가 슬플 때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 줄 수는 없지만, 해지는 것을 보려면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천문학자가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다.'

그렇게 우연히 검색창을 열었고, 그때 연재됐던 글이 최근에 책으로 출간된 걸 알게 됐다. 회사에 다니게 된 이후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한동안 책을 놓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출근길 지하철과 퇴근 후 저녁 시간 그리고 여유로운 주말 시간에 읽을 책이 생겼다.

별을 좋아한다. 우리 동네는 도시 치고 별이 많이 보이는 편인데 그런 날 별자리 앱을 켜서 밤 하늘을 찍으면 온갖 별자리들로 가득한 하늘을 볼 수 있다. 작년 여름, 친한 친구가 사는 원주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친구들과 함께 보던 별이 쏟아질듯한 밤하늘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마치 광활한 우주를 엿보는 기분이었다. 이런 이유로 지난 2주간 어딜 가든 이 책을 끼고 다녔는데 읽는 동안 훨씬 더 많은 이유로 작가님의 글을 좋아하게 됐다. 학부생, 대학원생, 여성, 교수님. 글 속에 담긴 이 모든 역할들이 글을 읽는 내내 밑줄을 치게 만들었다.


'대학이 그들에게 '배운 것'보다 배우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만의 의견을 갖는다는 것의 뿌듯함을 일깨워주기를 바란다. 자신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눈을 들어 앞으로 나아갈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우주의 이해'에서도, '글쓰기의 이해'에서도, '시민교육'이나 '전자기학', '천체물리학 개론'에서도 가르쳐주길 바란다. 어쩔 수 없이 대학을 꼭 다녀야만 한다면, 대학 졸업장이라는, 그 한없이 틀에 박힌 문서 하나가 주는 즐거움과 보람을 위해 기꺼이 젊음을 바칠 수 있기를, 넘치게 바란다.'


나도 대학에서 배우는 그 소중한 즐거움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인문대 학생, 그것도 어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에게는 취업에 대한 걱정, 사회에 나가서 무엇무엇을 해야 된다는 그 막막함 때문에 항상 불안해하곤 했다. 그럴 때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교수님이 계셨다면 조금 더 충만한 대학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미혼의 박사과정생이던 이소연에게 기자는 '골드미스'라는 단어를 꺼냈다. 우주에서는 노화가 빨리 진행된다는데, 여성이니 피부 문제에 신경 쓰이겠다고 했다. 우주에서 생리가 시작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도 물었다. 우주가 상당히 춥다더라는 기자의 우려 섞인 질문에는 고산의 대답만이 기사에 실렸다.'


능력이 있고 전문직인 여성에게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육아에 대한 책임이 뒤따른다.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생명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여도 여자가 남성 우주인 옆에 후보로 있다가 남자의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는 이유만으로 그 전문성은 쉽게 무시되곤 한다. 갑갑하다. 언제쯤 이런 시선이 바뀔 수 있을까.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라는 책 제목에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흔히 천문학자는 관측소에서 망원경을 들여다보거나 밤하늘을 바라보며 우주를 관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연구는 컴퓨터 모니터 관측을 통해 진행된다고 한다. 이 외에도 책을 읽는 내내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됐는데 태어날 때부터 문과형 인간이었던 내게는 이 모든 과정들이 흥미로웠다. 가끔 이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정말 '우주의 이해' 교양을 듣는 문과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는데 그마저도 대학을 졸업하고 학부 교양수업이 간절히 그리웠던 내게는 너무도 반가웠다. 책을 읽는 동안 주변 친구들에게 이 부분 너무 좋지 않냐며 꼭 읽어보라고 추천을 하고 다녔는데 앞으로도 한동안은 대학생이 된 기분으로 이 책에 푹 빠져지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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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조해진 외 지음 / 작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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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따뜻함을 잃고, 서로를 시기하고, 미워하게 된 걸까.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없을까. 이 책이 내게 그 해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며 수많은 일을 마주한다. 조해진 작가의 <완벽한 생애> 속 제주와 영등포, 그리고 홍콩의 시위 현장,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속의 용산.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아픔이 되고 상처로 남는다.


이 책에 실린 소설에 드러나는 공통적인 요소는 여성이다. 강화길 작가의 <음복>은 제사로 대표되는 가부장제를 통해 여성의 억압과 희생을 드러내고, 장류진 작가의 <연수>는 세대가 다른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다. 소설에 드러나는 한국 여성들의 자기서사는 그동안 남성 주인공들의 목소리에 갇혀 겉으로 드러나지 못했을 뿐, 훨씬 다양했다.


2020, 한국 소설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서 보고 싶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삭막한 현실을 다루고 있음에도, 책장을 덮고 나니 왜인지 그 안에서 따뜻함을 찾고 싶어졌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각각 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전하고자 하는 내용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차갑고 삭막한 현실에 맞서고자 하는 여성들의 연대, 그리고 따뜻함현실이 아무리 폭력적일지라도 내가 바뀌고자 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바라고 그렇게 움직인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렇게 믿고 있기에 독자들은 여전히 이 시대의 소설을 읽을 것이고, 작가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꾸준히 써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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