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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통 - 상처입은 중년의 마음 회복기
마크 라이스-옥슬리 지음, 박명준.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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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불안한 늦가을에, 오십을 바라보며 읽은 <마흔통>은 현재진행형 통증입니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평범한 삶에 찾아오는 불안과 우울을 이 책을 통해 추적하며 맘을 추스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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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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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김성윤 쌤 사회학계의 아이돌 학자다워요^^
반 정도 읽었는데,
짝퉁문화가 얼마나 안전한 따라하기인지 새삼 깨달았어요.
더 위험해야 한다는 김성윤 쌤의 한 방,
역시 쎄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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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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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누가 소설을 읽나? 이렇게 글을 시작하려니 내 마음도 불편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요즘 누가 책을 읽나?, 이렇게 묻는 게 맞다. 뭔가를 읽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물론 읽기엔 너무 시시한 소설(글)도 있고, 여러번 읽어도 결코 안 시시한 소설(글)도 있다. 나는 글이면 웬만한 건 다 읽어치우는 사람이니 당연히 소설도 읽는다. 읽는 행위에는 당위성이나 대가성이 없다. 읽을 때의 조용함과 몰입감이 나는 좋다. 사지를 맘껏 뻗을 수 있는 공간에 몸을 부린 채 모든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시간이 좋다. 마음의 목소리로 혼자 읽는 시간이 (아직까지는) 좋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스마트폰, 이 별것도 아닌 것들이 21세기 정신적 배틀의 승자가 될까봐 나는 오늘도 읽는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란 소설을 읽는 동안, 뭔가를 읽(어내)는 인생의 위대함에 탄복하면서.

 

시시한 소설에는 한마디의 예언도 없다. 소설이 무슨 예언서냐고?? 소설은 예언서뿐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어야 한다. 소설은 이야기다, 맞다. 소설은 잠언집이다, 맞다. 소설은 거짓말이다, 맞다. 소설은 아편이다, 맞다. 소설은 묵시록이다, 맞다. 소설은 쓰레기다, 맞다.

 

다 맞다. 소설은 무엇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생명력 있는 어떤 것,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그 무엇, 혹은 뭐라 규정할 순 없지만 인류 옆을 태초부터 중얼중얼 거리며 서성대는 이상한 기운임에 틀림없다.

 

제도판 위에 딱 붙어서, 그들은 자신이 직업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놀라운 덕목들을 소유하게 됐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계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이 지닌 대담함을 발휘해야 할 때면, 그들은 마치 망치로 사람을 죽여보라는 부당한 요구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기술을 통해 중요한 사람이 돼보려고 했던 좀더 성숙했던 두번째 시도는 재빨리 끝나버리고 말았다. (『특성 없는 남자 1』, 65쪽)

 

당신이 소설에서 이런 대목을 읽고도, 그깟 소설 한 구절, 하며 자신의 백치미를 과시한다면 소설뿐 아니라 어떤 글에서도 영감과 도전을 못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폭력화된 현대성을 통탄할 일이다.

 

로베르트 무질이란 소설가는 이미 백년 전에 기계 문명과 기술이 난무할 현대를 걱정했다. 특성 없는 남자 울리히가 엔지니어란 직업을 미련없이 버리는 선택에 나는 공감한다. 시민들의 뇌구조가 이상해지는 걸 울리히는 놓치지 않았다. 무질이 그려낸 시민들이 제국의 도시 카카니엔에서 불안정하게 사는 모습이 내게는 슬슬 거슬리던 차였다. 시민의 정체성은 정말 이런 거였나.

 

우리가 곧잘 사용하는 시민의식, 시민운동, 시민세력 같은 말속의 시민과 『특성 없는 남자』의 시민이란 존재는 어딘가 동떨어진 정체성을 지닌 듯하다. 20세기가 시작될 때만 해도 그 시절 시민들은 혹독한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세기의 모든 옛 것들, 봉건적이고 불공평하며 비민주적이었던 모든 것, 그 중에서도 그들을 지배했던 귀족들의 귀족스러움, 혹은 귀족됨이다.

 

 

퇴락하는 귀족들의 꽁무니를 따랐던 사람들, 전문지식이나 전문기술로 자본축적이 가능해지자 결국엔 귀족스러움, 혹은 귀족됨을 추구하며 귀족을 향한 묘한 향수의 열병을 앓았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시민이다.

 

당신은 시민이지만, 시민으로서 자연스럽고도 넉넉하게 살고 있지만,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았기에 스스로의 언어로 세상을 향해 말해야 할 때면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아니, 나를 뭘로 보고 망치로 사람을 치라는 거야?… 무질의 비유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를 대변할 수 있는 건 돈, 아니면 돈벌이가 가능한 직업, 혹은 내가 소유한 물건들, 한마디로 ‘특성’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나는 처음부터 없는 존재였으니 나의 정신은 당연히 없다.

 

그들이 본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구, 바로크식 궁정, 여전히 많은 하인들에게 삶을 의존하는 사람들, 엄청나게 방이 많은 현대 가옥들, 으리으리한 은행들, 그리고 최고위층 시민관료들의 집에 스며든 스페인식 엄격함과 중산층의 생활관습 등이었다. 대체로 귀족들에게는 수돗물도 안 나오는 집에 거대한 예절의 찌꺼기만 남았고 부유한 시민층의 집과 집무실에는 더 향상된 위생상태에 더 좋은 취향을 갖춘, 귀족생활의 창백한 복제품들이 재생산되었다. (『특성 없는 남자 2』, 173쪽)

 

그렇다면 건강한 시민의식이란 귀족을 흉내내던 촌스러움을 버려야만 가능해진다는 결론에 이른다.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모두 불안정하며 퇴폐적인 주된 이유는 시민계급이 발생하며 배태된 그들의 허위의식 때문일 것이다. 무질은 그러한 텅 빈 의식의 단면을 결코 아량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는다. 시민사회의 속됨과 경박함은 집단적인 범죄행위, 이를 테면 전쟁과 같은 인류의 불행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만큼 거세게 일기 시작한다(이를테면 소설 속의 평행운동). 세기말의 비엔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멸망이 코앞에 닥친, 현대라고 하기엔 아직은 봉건적이고 미개한 백년 전의 어느날, 로베르트 무질은 시대가 뿜어내는 공포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매서운 문장과 문명화를 비웃는 특유의 사유체계로 마무리하지 못할 이 소설을 시작한다. 백년 후 자신이 예언자로 명명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이것도 소설이냐고 누군가 물으신다면, 소설은 무엇도 다 될 수 있고 아무것도 다 아닐 수도 있다는 똑같은 대답밖에는.

 

『특성 없는 남자』와 같은 소설이 다음 세기에도 탄생할 수 있을까. 지금도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없고, (세 번씩이나!) 읽어도 해독 불가능을 호소하는 (나와 같은) 시민들이 득시글거리는데, 우리의 현대성은 이 향수병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말하자면 귀족의 귀족스러움과 귀족됨을 그리워했던 세기말의 그들과 우리가 동일하다 할진대 현대성에 절어버린 우리에게 누군가는 벌이라도 내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을 고통스럽게(?!) 읽은 한 시민의 절규는, 자학과 자해의 형태로 다짐을 반복하게 하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그래도, 읽겠다는 것이다. 내 투쟁의 도구는 읽기요 쓰기요 밑줄치기요 연필깎기인 것이다. 그래서 나도 화끈하게 『특성 있는 여자』란 소설로 무질의 경지에 도전해볼까 생각(?!^&~! ㅋㅋ…)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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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브 -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오언 존스 지음, 이세영 외 옮김 / 북인더갭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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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마도 1990년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수원에 있는 학교까지 국철을 타고 다녔다. 환승역의 대명사인 신도림역의 소음과 인파는 지금도 공포스럽다. 집으로 가기 위해 2호선으로 갈아탄 나는 늘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아줌마를 힐끗 쳐다본 기억이 난다. 그 아줌마는 전철문이 닫히기 전 필사적으로 계단을 내려와 전철에 몸을 실으려 했지만 아줌마 코앞에서 문은 야속하게 닫히고 말았다. 전철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전철을 놓친 아줌마는 무안하지만 억울하다는 얼굴로 승강장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저 아줌마 어떡하면 좋아나야말로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줌마가 안 돼보여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그때 나는 탈모가 시작될 만큼 근심 걱정을 안고 사는 대학교 3학년생이었는데, 모두가 그랬듯이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미래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타인의 스쳐가는 허탈한 표정 하나에도 울컥했던 것 같다.

 

여기서부터 배제당하면 안 되는데, 나는 더 노력해야 되는데, 나를 더 계발해야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듯이 나도 높은 연봉에 넓은 집과 큰 차를 소유해야 하는데아마도 나는 만나보지도 못한 마거릿 대처라는 영국 할머니의 망령에 사로잡혔던 게 분명하다. 그리 하여 아마도 병원엘 찾아갔다면 당신은 우울증입니다라는 진단도 그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받아냈을 것이다.

 

지방대라는 말보다 더 차별적으로 들렸던 수도권대, 그리고 특징없는 행정학과, 거기다 용모가 단정치 못한 여대생그때 아무리 경제가 호황이어도 이 정도면 빌빌거리기 딱 좋은 캐릭터였다. <차브>들처럼 감히 마약에 손을 대지도 않았고, 강심장이 못돼 십대에 아이를 갖지도 않았고, 패거리로 다니며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지도 않은 나는 대학생인데다 자존심은 있어서 스스로를 잉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누군가 나를 깔볼까봐 늘 공격적인 태세로 이십대를 보냈다.

 

나의 옛 모습이지만 참, 못났다. 나는 당신들처럼 허접 쓰레기가 아니야, 라고 늘 다짐하며 수원행 열차를 기다렸지만 결국 나는 있지도 않은 사다리를 타고 기어올라 다른 클래스에 내 삶을 안착시키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었고, 옳고 그른 걸 따지는 건 촌스러울 뿐 아니라 구차해보였기 때문이다. 가난하면 가난할 수밖에 없도록 니가 무능력하고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서로를 비난했다. 그러면 편리했다. 사회의 은폐된 구조적인 악은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매스컴과 정치인들이 떠드는 대로 생각없이 사는 건 정말 완전 편리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전철을 놓친 어떤 아줌마에게 다음 전철이 곧 오니까 앉아서 좀 쉬면서 기다리세요.’라고 위로하고 싶었던 내가 찌질해 보였다. , 못나기도 했지만 그래서 내 이십대가 아직도 짠하기도 하다.

모독당한 인간 존엄을 위하여라고 적힌 겉표지의 문구만으로도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내가 당한 것은 모독이 아니라 나의 탐욕에 기인한 어리석음이었지만,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건 경쟁과 비난이 아니라 협력과 평등임을, 또한 상식적이고도 친절한 말 한마디임을 <차브>를 읽으며 다시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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