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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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누가 소설을 읽나? 이렇게 글을 시작하려니 내 마음도 불편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요즘 누가 책을 읽나?, 이렇게 묻는 게 맞다. 뭔가를 읽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물론 읽기엔 너무 시시한 소설(글)도 있고, 여러번 읽어도 결코 안 시시한 소설(글)도 있다. 나는 글이면 웬만한 건 다 읽어치우는 사람이니 당연히 소설도 읽는다. 읽는 행위에는 당위성이나 대가성이 없다. 읽을 때의 조용함과 몰입감이 나는 좋다. 사지를 맘껏 뻗을 수 있는 공간에 몸을 부린 채 모든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시간이 좋다. 마음의 목소리로 혼자 읽는 시간이 (아직까지는) 좋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스마트폰, 이 별것도 아닌 것들이 21세기 정신적 배틀의 승자가 될까봐 나는 오늘도 읽는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란 소설을 읽는 동안, 뭔가를 읽(어내)는 인생의 위대함에 탄복하면서.

 

시시한 소설에는 한마디의 예언도 없다. 소설이 무슨 예언서냐고?? 소설은 예언서뿐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어야 한다. 소설은 이야기다, 맞다. 소설은 잠언집이다, 맞다. 소설은 거짓말이다, 맞다. 소설은 아편이다, 맞다. 소설은 묵시록이다, 맞다. 소설은 쓰레기다, 맞다.

 

다 맞다. 소설은 무엇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생명력 있는 어떤 것,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그 무엇, 혹은 뭐라 규정할 순 없지만 인류 옆을 태초부터 중얼중얼 거리며 서성대는 이상한 기운임에 틀림없다.

 

제도판 위에 딱 붙어서, 그들은 자신이 직업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놀라운 덕목들을 소유하게 됐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계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이 지닌 대담함을 발휘해야 할 때면, 그들은 마치 망치로 사람을 죽여보라는 부당한 요구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기술을 통해 중요한 사람이 돼보려고 했던 좀더 성숙했던 두번째 시도는 재빨리 끝나버리고 말았다. (『특성 없는 남자 1』, 65쪽)

 

당신이 소설에서 이런 대목을 읽고도, 그깟 소설 한 구절, 하며 자신의 백치미를 과시한다면 소설뿐 아니라 어떤 글에서도 영감과 도전을 못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폭력화된 현대성을 통탄할 일이다.

 

로베르트 무질이란 소설가는 이미 백년 전에 기계 문명과 기술이 난무할 현대를 걱정했다. 특성 없는 남자 울리히가 엔지니어란 직업을 미련없이 버리는 선택에 나는 공감한다. 시민들의 뇌구조가 이상해지는 걸 울리히는 놓치지 않았다. 무질이 그려낸 시민들이 제국의 도시 카카니엔에서 불안정하게 사는 모습이 내게는 슬슬 거슬리던 차였다. 시민의 정체성은 정말 이런 거였나.

 

우리가 곧잘 사용하는 시민의식, 시민운동, 시민세력 같은 말속의 시민과 『특성 없는 남자』의 시민이란 존재는 어딘가 동떨어진 정체성을 지닌 듯하다. 20세기가 시작될 때만 해도 그 시절 시민들은 혹독한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세기의 모든 옛 것들, 봉건적이고 불공평하며 비민주적이었던 모든 것, 그 중에서도 그들을 지배했던 귀족들의 귀족스러움, 혹은 귀족됨이다.

 

 

퇴락하는 귀족들의 꽁무니를 따랐던 사람들, 전문지식이나 전문기술로 자본축적이 가능해지자 결국엔 귀족스러움, 혹은 귀족됨을 추구하며 귀족을 향한 묘한 향수의 열병을 앓았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시민이다.

 

당신은 시민이지만, 시민으로서 자연스럽고도 넉넉하게 살고 있지만,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았기에 스스로의 언어로 세상을 향해 말해야 할 때면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아니, 나를 뭘로 보고 망치로 사람을 치라는 거야?… 무질의 비유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를 대변할 수 있는 건 돈, 아니면 돈벌이가 가능한 직업, 혹은 내가 소유한 물건들, 한마디로 ‘특성’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나는 처음부터 없는 존재였으니 나의 정신은 당연히 없다.

 

그들이 본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구, 바로크식 궁정, 여전히 많은 하인들에게 삶을 의존하는 사람들, 엄청나게 방이 많은 현대 가옥들, 으리으리한 은행들, 그리고 최고위층 시민관료들의 집에 스며든 스페인식 엄격함과 중산층의 생활관습 등이었다. 대체로 귀족들에게는 수돗물도 안 나오는 집에 거대한 예절의 찌꺼기만 남았고 부유한 시민층의 집과 집무실에는 더 향상된 위생상태에 더 좋은 취향을 갖춘, 귀족생활의 창백한 복제품들이 재생산되었다. (『특성 없는 남자 2』, 173쪽)

 

그렇다면 건강한 시민의식이란 귀족을 흉내내던 촌스러움을 버려야만 가능해진다는 결론에 이른다.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모두 불안정하며 퇴폐적인 주된 이유는 시민계급이 발생하며 배태된 그들의 허위의식 때문일 것이다. 무질은 그러한 텅 빈 의식의 단면을 결코 아량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는다. 시민사회의 속됨과 경박함은 집단적인 범죄행위, 이를 테면 전쟁과 같은 인류의 불행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만큼 거세게 일기 시작한다(이를테면 소설 속의 평행운동). 세기말의 비엔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멸망이 코앞에 닥친, 현대라고 하기엔 아직은 봉건적이고 미개한 백년 전의 어느날, 로베르트 무질은 시대가 뿜어내는 공포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매서운 문장과 문명화를 비웃는 특유의 사유체계로 마무리하지 못할 이 소설을 시작한다. 백년 후 자신이 예언자로 명명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이것도 소설이냐고 누군가 물으신다면, 소설은 무엇도 다 될 수 있고 아무것도 다 아닐 수도 있다는 똑같은 대답밖에는.

 

『특성 없는 남자』와 같은 소설이 다음 세기에도 탄생할 수 있을까. 지금도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없고, (세 번씩이나!) 읽어도 해독 불가능을 호소하는 (나와 같은) 시민들이 득시글거리는데, 우리의 현대성은 이 향수병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말하자면 귀족의 귀족스러움과 귀족됨을 그리워했던 세기말의 그들과 우리가 동일하다 할진대 현대성에 절어버린 우리에게 누군가는 벌이라도 내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을 고통스럽게(?!) 읽은 한 시민의 절규는, 자학과 자해의 형태로 다짐을 반복하게 하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그래도, 읽겠다는 것이다. 내 투쟁의 도구는 읽기요 쓰기요 밑줄치기요 연필깎기인 것이다. 그래서 나도 화끈하게 『특성 있는 여자』란 소설로 무질의 경지에 도전해볼까 생각(?!^&~! ㅋㅋ…)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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