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옮기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은 크게 두 개였다. 하나는 의사의 ‘양심’ 때문이었고 하나는 그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양심’은 그가 직접 한 말이고, ‘자존심’은 숙고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가 처음 끊어준 진단서에 의하면 나의 요양 기간은 6개월이었다. 6개월이 어느 정도냐면, 조현병 등 대중이 빠른 시간 내에 알아봄 직한 질환을 제외하면 진단서가 허용하는 최대 기간이라고 보면 된다. (...) 그러나 6개월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기한이 다 되었음에도 나는 아직 사회에 복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 없음을 토로하자 그는 선선히 추가 진단서를 내주었다. 그러나 요양 기간은 6개월이 아닌 3개월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나는 기간을 연장해 주실 수 없겠느냐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나는 3개월보다는 더 긴 ‘요양’이 필요한 상태였다. 비록 겉으로는 평온히 지내는 듯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는 데서 오는 평화였고, 문밖을 나서는 순간 깨질 수밖에 없는 취약한 것이었다. 아직 나는 그것을 맞이할 준비도 각오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진심을 다해 “사람 하나 살리시는 셈 치고” 기간을 연장해 주십사고 부탁했으나 그는 “의사의 양심을 걸고” 그것은 불가하다고 딱 잘랐다. 이미 병원을 이렇게 오래 다녔는데 6개월의 요양 기간 추가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결과는? 3개월이라는 시한이 주는 압박으로 인해 호전되는 듯했던 나의 증세는 급격히 나빠져 이전 1년 간의 ‘치료’가 거의 무위로 돌아갈 지경이 되었고, 결국 그는 세 달이 지날 무렵 새로운 6개월의 진단서를 (자의로) 끊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 봐. 내가 뭐랬냐고.
자존심 에피소드도 마저 써보려고 했는데 그건 공공연히 내어 놓기엔 너무 구체적이라 생략하고... 어쨌든 위와 비슷하게 나는 뭔가를 요청했고 그는 역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결정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뭐랄까, 나는 매우 질린 기분이 들어버렸다. 비록 내게 불리하거나 안 좋은 결과라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합리적 상황에 대해서는 크게 상심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매우 합리적이고 흠잡을 데 없는 그의 결정에 대해 마음이 싸늘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휴대전화에서 병원 연락처를 지우고 그의 처방약을 한데 모아 구석에 처박았다. 많이 알려진 상식이지만 정신과 약의 증감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약을 끊을 때도 점진적으로 줄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약을 한꺼번에 내다 버린 내 결정은 매우 위험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린이 아니라도 따라 하지 마시라. (또 참고로 그 후 1주일 동안 지독한 수면장애에 시달리던 나는 비몽사몽이 되어 산 넘고 물 건너 ‘예약을 받지 않는’ 병원을 찾아 새로운 약을 처방 받았다.)
그가 내린 결정이 내게 미치는 파장을 고려했더라면 그는 (자신의 양심과 자존심을 다치지 않고도) 충분히 좀 더 유용하고 합리적이지만 원칙에서 벗어나지도 않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처음 내린 결정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결국 그 판단은 나를 치유하는 데 한 톨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 결정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사실 나는 그를 만나기도 전에 이미 그걸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아쉬웠던 건, 그렇다면 이 환자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의사로서 환자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그가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 듯했다는 데 있다. 질린 듯한 기분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그의 ‘양심’과 ‘자존심’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곱씹게 되는 것이다.
한 줄 요약: 빈정 상해서 병원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