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응급실도 아니면서 대개 병원에서 약을 직접 처방해서 지어준다. (그러니 프라이버시가 걱정되는 분들은 걱정 말고 가시라.) 그게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어느 날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약을 병원에서 지어주는 건 환자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서인가요, 향정신성의약품이기 때문인가요?”
“둘 다요.”
흠, 괜찮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잠깐 딴소리를 하자면, 내가 전에 다녔던 병원에서는 의사가 약의 종류와 효능, 부작용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해 주었으나 정작 정확히 무슨 약인지는 알려주지 않아서 약 모양을 보고 내가 검색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처방내역을 보려면 진료기록 사본을 요청해야 했다.) 정신과는 처음이라 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안 그런 병원도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친구가 다니는 병원은 원내 처방전을 사진으로 찍어가라고 한다고 하고, 최근 내가 옮긴 병원에는 약 이름이 약 봉지에 인쇄되어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병원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게다가 초진 때 준 안내문에는 “원내에서 구비하는 약은 원내처방으로, 원내에 없거나 가루약, 자르기 어려운 약은 처방전 발급하고 있습니다”라고 추가 정보까지 준다. (이와 별개로 손에 들어온 거의 모든 텍스트를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땡땡님”으로 시작하는 이 한 페이지 안내문에 환자들이 궁금해 할 거의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는 데 매우 흥미를 느꼈다. 이 의사, 나랑 좀 비슷한 구석이...) 문제는 그 안내문을 몇이나 읽을지 모르겠다는 것이지만.
뭐 아무튼, 이쯤에서 왜 정신과 약은 병원에서 직접 지어주는가, 근거를 찾아보기로 했다.
「약사법」 제23조(조제) 4항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1번에서 14번까지 의약분업 예외상황이 있다. 그 중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나에게 해당하는 것은 3호뿐이다.
3. 응급환자 및 조현병(調絃病) 또는 조울증 등으로 자신 또는 타인을 해칠 우려가 있는 정신질환자에 대하여 조제하는 경우
어 그러니까
- 환자의 프라이버시 고려: 전혀 아님
- 향정신성의약품 취급: 반은 맞음(향정신성의약품 취급이 까다로운 것으로 알고 있음).
그러나 위 예외사항의 초점은 향정신성의약품이 아니라 ‘정신질환자’라는 점에서 반만 맞음
그러니까 나는 국가에서 인정한 “자신 또는 타인을 해칠 우려가 있는 정신질환자”라는 건데, 나를 해칠 생각도, 타인을 해칠 생각도 없는 나로서는 좀 억울하고 기분이 좋지 않다. 환자 입장에서 강변한다 한들 설득력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 어린 저 문구와 항목은 예외로 하더라도) “개인정보 보호를 위하여 처방전을 공개할 수 없는 경우”라는 사유도 좀 추가해 주면 어떨까 싶다. 같은 항 13호에는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된 정보 및 보안을 위하여 처방전을 공개할 수 없는 경우”라는 사유가 있던데 말이다. 이제 우리도 국가뿐 아니라 개인의 권리도 좀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