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의 온갖 검사 후 의사를 만났는데 그는 나를 보자마자 우울 정도가 왜 이렇게 높냐는 말부터 꺼냈다. 그의 앞에 놓인 결과지에는 아주 큰 봉우리 한 개와 작은 봉우리 한 개가 솟아 있었다. (마추픽추와 와이나픽추?)


작은 봉우리는 ‘피해의식’이라고 했다. 피해의식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항목이다. 피해의식, 피해의식이라... 무엇에 대해? 왜 때문에? 그날 병원을 나와서 계속 생각하다 나는 그 피해의식의 정체를 깨달았는데, 그 깨다ㄹㄹ~음은 다른 기회에 써보기로 하고,


그렇게 오래 약을 먹어왔는데 대체 왜? 혹시 우리 병원으로 옮긴 것 때문에 병세가 더 악화된 것은 아닌지? 의사는 크게 걱정했다. 그래서 나는 진실을 말해주었다.


선생님, 그건 뭐랄까, 제 기저질환 같은 거예요. 평소에 잘 조절하면서 살면 괜찮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면 문제가 되는 거죠. 괜찮습니다. ... 안타깝게도 그는 내 말을 이해할 성 싶진 않았다. 물론 그것이 의사로서의 당연한 소명일 테지만.


세상엔 착하디 착한 사람, 정의감이 강한 사람, 매사 낙관적인 사람, 정말 다양한 인간군상이 있듯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우울한 나 같은 인간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밑에 잔잔히 깔린 이 영역은 ‘호전’되지 않을 것이다. 의사들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리고 그에 대해, 나는 정말 괜찮다. 내가 그렇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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