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화를 즐기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영화가 주는 정보를 제대로 소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볼 때마다 값을 치러야 하는 영화보다 책을 사서 읽는 게 더 남는 장사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지만, 나도 한 번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일부러 열심히 영화관과 비디오방을 다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인정한다. 나는 영화를 잘 못 보겠다. 시청각적으로든 구성으로든 스토리로든. 예민하기로 정평이 난 나의 감각은 희한하게도 (아니면 균형을 맞추려고?) 그쪽으로는 발달하지 않아서 남들 다 본 장면을 혼자 놓치기도 하고, 이 배우와 저 배우를 알아보지 못한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를 구분하지 못했던 건 아마 나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비슷한 옷을 입고 그렇게 비슷한 송곳니를 가졌는데 어떻게 그 둘을 구분한단 말인가!) 책이 좋은 건 언제든지 앞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비교적 극영화보다 내용을 따라가기 쉬운 다큐멘터리라는 것과 우연찮게 표를 하나 얻었다는 이유였다.


90년대 중후반, 소위 ‘영 페미’라 불렸던 페미니스트들의 과거와 현재를 동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매일매일”을 만든 강유가람 감독은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2010년부터 시작됐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영화를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감독의 친구들이자 예전에 각자의 자리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던, ‘라떼’의 시절에 서로의 삶을 공유했던 주인공들은 현재 모두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민박집 주인, 수의사, 인디 뮤지션... 언뜻 보면 ‘페미’와 관계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영화는 등장인물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면서 민박집 주인의 (지역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꾸러미 사업과 지역 여성단체 활동을, 수의사의 소싸움 반대 1인 시위를, 여성의 서사를 담는 감독 자신의 현재를 보여준다. (감독이 주인공들과 술 마시는 장면이 ‘오조오억’ 번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


시간과 장소와 대상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 조금 달라졌을 뿐, 그들은 여전히 과거에도 현재에도 페미니스트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듯 당신도 혼자가 아니라는 오글거리는 말은 그 누구도 꺼내지 않지만 그 담담함에 더 큰 위안을 받게 되는 영화.


좋은 영화였다. 그러나 그 ‘영 페미’들은 여전히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영’하게 활동했던 시기 나는 다른 문제에 더 골몰했었고, ‘영 페미’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영 영(young)과는 거리가 멀어졌을 때니까.


그러다 며칠이 지나 불현듯 나의 ‘영’했던 시절 한 순간이 떠올랐다.

이제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옛날, 느닷없이 회사를 관두고 온 선배는 페미니즘 모임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어릴 때부터 궁금했던 ‘닭다리는 왜 아빠랑 오빠만 먹는가’에 대한 해답을 그때까지 찾지 못한 나를 비롯, 아는 얼굴 너댓 명이 모였다. 책 읽고 세미나도 하고, 대자보도 붙이고, ‘이런 시기’에 ‘대의’를 거스른다고 ‘같은 편’에게 비판도 받고, 피 터지게 싸우기도 하고... 몇 달을 그러다 흐지부지 되었던가? 마지막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뭘 하고 있나.

모임을 처음 제안했던 선배는 여성단체 활동가가 되었고, 한 명은 여러 곳을 전전했으나 어쨌든 페미니즘 언저리에서 연구도 하고 활동도 하고 있고, 한 명은 또 반성매매단체 활동가가 되었다. 나머지 하나는 여성학을 전공하겠다며 몇 년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대학원생이 된 후... 지금은 전공을 살려 먹고 살고 있다.


그들만 매일매일이 아니라 우리 또한 매일매일이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순간. 우리 역시 이 자리에서 매일매일 페미니스트로 새롭게 태어나고, 치열하게 성찰하고, 세상을 더 좋은 쪽으로 바꾸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우리도 매일 매일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한 줄 요약: 한 번 페미는 영원한 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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