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는 1년 반 동안 다니던 병원을 바꾸었는데, 우연찮게 다른 걸 검색하다 알게 된 그 병원을 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예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흔히들 예약은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이롭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특히 정신건강의학과 예약은.
많은 사람들이 감당키 어려운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 있거나 '미칠 것 같은' 기분이 지속되어도 정신과 방문을 저어한다. 그러다 몇은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고, 또 몇은 기존의 세계와 결별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창조하기도 하고, 또 몇은 그 상황에서 파괴적으로 벗어나기도 하고... 그 중 몇은 매우 다행히도 다른 결론을 내리는데, 병원에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검색을 통해, 혹은 평소 위치를 보아둔 정신건강의학과로 냅다 뛰어간다. 그러나 문을 여는 순간 십중팔구 듣게 되는 말은 "초진은 예약 진료만 가능합니다"라거나 "저희 병원은 예약 환자만 받습니다"이다. 병원까지 오는 데 이미 무수한 내적 갈등과 심신의 불안정을 겪고, 얼마 남잖은 에너지를 쥐어 짜서 겨우 병원에 도착했을 환자에게 이는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다. 일단 병원만 가면 이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 병원에서마저 나를 거절하다니, 그 당혹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진료를 기다리면서 미예약 환자 진료 절대 불가라는 방침을 듣고 어쩔 줄 몰라하며 접수대 앞을 서성이다 결국 힘없이 문을 열고 나가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물론 나도 처음에 겪었던 일이다.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이 정말 너무 절실해 보여서, 내 예약 시간을 그냥 그에게 주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래봤자 의사는 진료를 안 해줄 테니 별무소용이었겠지만. 그리고 가끔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들을 생각한다. 당일 진료가 안 되면 그 자리에서 초진 예약을 하고 가면 되는데, 그 며칠도 견딜 자신이 없어 조용히 돌아선 그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한 줄 뉴스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 대부분 보도도 되지 않은 무수한 죽음 속에 그가 있지는 않기를. 부디 어딘가 예약 없이 초진도 기꺼이 진료해 주는 병원을 찾아 적절한 도움을 받았기를.
참고로 이 경우 환자 입장(내 생각)에서는 두 가지, 아니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운 좋게 예약 없이도 진료해 주는 정신과를 찾아 방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병원에 일일이 문의하기 전엔 알 수가 없다. 차선책 중 하나는 24시간 운영하는 정신과 응급실을 찾는 것인데, 이건 내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으므로 생략. 세 번째는 근처 가정의학과 의원을 찾는 것이다. 이게 내가 택했던 방식인데, 평소 다니던 근처 가정의학과에 가서 상태와 상황을 설명하고, 정신과 예약일 전까지 복용할 수 있는 약 처방을 부탁했다. 의외로 의사는 이런 저런 것들을 물어봐 주고, 최선의 처방을 해 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정신과 방문을 겁내는 사람들이 종종 가정의학과에 와서 처방도 받고 울다 가기도 한단다. 그러니 처음부터 정신과 가는 것이 어렵거나 초진 예약일까지 버티기 어려울 때는 가정의학과에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 당시 나는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이 너무 심각해 처방 받았던 약이 큰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의사의 공감 어린 눈빛은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예약은 병원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도 환자에게도 편리하고 합리적인 제도라고들 한다. 신체에 관한 진료과목에서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정신건강의학과의 예약제는 다르다. 예약제로 운영하는 병원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고, 나름의 장점도 있을 게다. 그렇지만 순전히 일개 환자인 내 관점에서 예약만을 고집하는 병원은 뭐랄까, 환자보다 병원 운영이나 의사를 중심으로 둔다는 느낌이다. 예약제로 운영하면 예약된 사람만 진료하면 그뿐, 진료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의사가 알 바 아니다. 환자도 예약 시간에 맞춰 와서 간단히 상담하고 약물 처방만 받으면 된다. 그러나 나는 다시, 그 순간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예약 없이 들이닥치는 사람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위해 기꺼이 내 시간을 연기할 의향이 있다.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려 드디어 새 의사를 만났다. 기다리는 동안 종장을 향해 가는 토지도 읽고 간단히 스트레칭도 하고, 각종 수료증도 구경했다. 그에게, 예약을 받지 않는 병원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고 했더니 뜻밖이었나 보다. “기다리셔야 하잖아요?”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예약제를 하면, 피치 못하게 예약 날 오지 못한 환자는 다시 예약을 잡기 위해 한 달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그런 분은 병원에 다시 못 온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눈앞의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리 없다. 나는 당분간 기꺼이 그의 환자가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