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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 연암 박지원이 가족과 벗에게 보낸 편지 참 우리 고전 6
박지원 지음, 박희병 옮김 / 돌베개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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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는 물건

포(脯) 세 첩
감떡 두 첩
장볶이 한 상자
고추장 한 단지

이것은 연암이 아들에게 편지와 함께 보낸 물품 품목이다. '고추장 작은 단지 하나를 보내니 사랑방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게다. 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완전히 익지는 않았다.' 라는 편지를 쓰고 알뜰살뜰 물건들을 챙겨 넣는 모습에서 지극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다. 연암은 51세가 되던 해에 아내를 잃고 재혼도 하지 않은 채 9년째 홀로 살면서 이렇게 직접 고추장도 담그며 아내몫까지 자식들을 챙기느라 그렇게 살뜰했나 보다. 처음 책 제목을 대할 때 어렴풋하게 예감은 했지만, 그리고 그가 실학파 학자임을 염두에 두면 손끝에 물 한방울 못 묻히는 조선시대의 고리타분한 양반과는 사뭇 다르리라곤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팔뚝을 걷어부치고 고추를 빻고 간을 보며 장을 담그리라고는 미처 몰랐다. 어디 고추장뿐이겠는가.  21세기에도 밥 못하는 남자가 수두룩한데 지금부터 200년 전의 연암은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사상을 생활 중에도 실천한 앞서간 사람이란 걸 알 수았다.

기존의 서간집 " 연암집"에 실리지 않았던 이 책의 편지들을 보면서 연암의 개인적인 성향과 성격이 뚜렷하게 그려졌다.  "열하일기", "일하구도야기" 에서의 보여주던 호방한 사상과 대문호로서의 기품, 그리고 다림질해서 잘 다듬어 놓은 외출복같던 "연암집"에서 보던 그에 대한 인상이 이 책에서는 좀 더 인간미가 넘치며 개성도 강한 그런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편지의 대상이 큰아들을 비롯한 가족과 친분이 두터운 벗끼리 티끌하나 숨길 없이 서로를 적나라하게 아는 사이에서 사심없이 주고받는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라서 그런가 보다. 연암은 잔정이 많아 자상하지만 한편으론 소심할 정도로 세밀하고, 우스개소리도 쉽게 내뱉는 소탈한 성격에 솔직 담백하다.

조선후기의 대사상가요, 대문호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엿본다는 것은 양지바른 장독대에서 잘 익은 고추장을 한 숟갈씩 떠먹는 것 같은 아기자기한 재미이다. 화장지운 미녀들의 맨 얼굴을 본다는 것은 자칫 실망스러울 수 있으나 연암의 맨 얼굴은 생사고락을 겪는 인간미가 넘쳐서 좋다. "연암이 보여주는 이 모든 얼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대를 벗어날 정도의 큰 흠이나 위선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연암은 우리를 '배신'하고 있지 않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는 역자의 말에 동감한다. 사족으로 이 책을 소장한다는 것도 잘 익은 고추장 단지 하나 갖고 있는 것 같은 기쁨이다. 고추장맛도 좋아야 하겠지만 항아리도 이쁘장하고 반들반들 윤이 난다면 장독대만 바라봐도 기분이 좋다. 원전 "연암선생 서간첩"이라는 제목보다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라는 제목도 운치있고(운치뿐만 아니라 책의 성격을 한마디로 잘 포착한, 적군의 성문을 함락시키는 것과 같은 빼어난 제목이다)표지도 아담하게 예쁘다. 그야말로 오종종한 고추장 단지 같은 책이다. /060420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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