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대로 살어, 자연스럽게. 억지 부리지 말고." 지언이 역사연구원 시험에서 떨어진 날, 아버지가 끓여 준 라면은 유난히 맛있었다. 그 맛이 너무 좋아서 면발을 훅 빨아들였다. - P158
책을 열자 그때 아버지가 해 준 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만하면 됐다고 했다. 너무 억지로 애쓰지 말어. 하늘과 땅이 영원한 것은 자신이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잖어. 빈 곳이 있는 이유는 언젠가는 채울 것이 있기 때문이니까. 빈 채로 있는 것도 괜찮어. 여봐, 작은 고춧가루라도 숨구멍으로 들어가면 기도 전체를 막고 식도로 들어가면 면발, 국물, 계란과 잘 어우러져 흘러가잖어. - P158
어떤 날의 책은 이것저것 볼 것 없이 그냥 들이받으라 하고, 어떤 날의 책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니 그저 흘려보내라 하며, 다른 날의 책은 한 장 한 장 처연하게 같이 울어줬다가, 또 다른 날의 책은 아련한 종이의 질감처럼 따뜻하게 위로를 건네는 것이었다. - P197
모르고 한 나쁜 짓. 이 말에 지언도 가슴이 짓눌렸다.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매일매일은 느끼지 못한다. 아무도 그럴 정도로 민감하게 남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루를 살아 내기 바쁜현대인은 지금 여기, 현재에 충실할 뿐이고 하루라는 짧은 시간은내 삶을 돌아보기에도 부족해서 남들의 이야기가 부당한지 정당한지 관심을 가질 틈이 없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호기심은 오늘의 뉴스를 들으며 쯧쯧 내뱉는 두 글자로 충분할 정도다. - P214
한때는 그렇게 밝았던 빛이 지금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해도 어떠랴
비록 초원의 광채도 꽃의 영광의 시간도 그 어느 것도 되돌릴 수 없지만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 있는 것들의 힘을 찾아낼 것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존재할 태곳적의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에서 나온 따뜻한 위로의 생각에서
죽음을 꿰뚫어보는 신념 속에서 지혜로움을 가져다주는 세월 속에서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초원의 빛‘) - P217
지금 살아 있는 사람과 옛날 사람이 만나는 곳 인생이 막 시작되는 사람과 오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모이는 곳 (요스타케 신스케의 『있으려나 서점에서 인용함)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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