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마음조차 잘 알 수 없는데 남의 마음을 알 턱이 없다.남의 마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몰라서 다행이다. 하고 아유미는 생각한다. 알 수 있는 거라면 개나 고양이처럼 서로의 냄새,울음소리, 몸짓이 더 믿음이 간다. 말 같은 건 사실상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안거나 안기거나 할 때 자신의 감각, 감촉 정도가 아닐까. 상대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몰라도 감각이나 감촉은 믿을 수 있다.아유미는 아버지로부터 그런 생각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른다.
헤어진다는 것 안에는 멀어지는 힘과 함께 돌아오는 힘이 작용하는 것 같다. 아유미는 정신이 아찔해질 것 같은 타원을 그리는 혜성의 궤적을 좋아했다. 혜성 중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않는 것도 있다. 이백 년이 걸려 돌아오는 것도 있다. 태양에 다가갈수록 꼬리를 길게 끌고 빛나며 태양으로 얼굴을 향하는 혜성, 어떤 인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똑바로 나아가는 혜성은하나도 없다. 자기 뒤에 꼬리가 뻗어 있는 것을 상상했다. 이치이와 지금 헤어지게 되어도 그것은 헤어짐이 아닐지도 모른다.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유미 안에 천문학이 자리 잡았기때문이다.
아이들이 불러서 베란다로 나가 보니 저녁때인데도 대마도가 뚜렷이 보인다. 어제 쾌청한 날에도안 보이던 대마도가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나타나 보인다. 우리 눈에 안 보일 때도 대마도는 거기 있었을게 아닌가. 그렇다면 보인다고 다 있는 건 아닐지도모른다. 내가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환상일 것도 같다. 어쩔거나, 이 인생의 덧없음을.
살아 있다는 감각과 동시에 찾아오던 이미 늙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 아,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기억들은 어째서 이렇게나 생생할까?
살아 있다는감각과 동시에 찾아오던 이미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아,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기억들은 어째서 이렇게나 생생할까?
모든 미투 폭로자들처럼 젠틸레스키는 사회적 편견과 싸야 했고, 동시에 자기 안의 비굴함과도 싸워야 했다. 이것은 안타깝게도 17세기나 21세기나 다르지 않다. 아마 그녀가 삶을 포기했거나 그림을 포기했다면, 세계는 고개를 숙인 패배자들 위에 비열한 인간들이 히히덕대며 군림하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그녀는 타시라는 치졸하고 더러운 강간범이나 그 패거리와만싸운 것이 아니다. 그녀는 모욕받은 사람을 비하하는 그 모든 불의와 싸워 이겼다. 그래서 이 그림은 무엇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는 한 인간의 숭고함, 더 나아가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작품이 되었다. 진실을 위한 한 인간의 위대한 투쟁이 진정 아름답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