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알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26
크레티앵 드 트루아 지음, 최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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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지 않은 지폐는 돈이 아니야.

그라알 이야기

크레티앵 드 트루아/최애리 옮김

을유문화사










  나는 어릴 적부터 오락실을 자주 다녔다. 맞벌이였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지라 어머니가 가서 놀라고 돈을 쥐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이십 년이 훨씬 넘도록 계속 이어진 오락실과의 인연들은 나를 많은 게임 세계에 빠지게 만들어주었다. 월등히 잘하는 실력이 아니었기에 엔딩을 보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 중 ‘원탁의 기사’는 당연 나의 돈을 많이 잡아먹던 게임이었다. 그 이전 시대에 ‘황금도끼’라는 엄청난 대작이 3편까지 나오며 히트를 쳤지만, 그리고 붉은 용과 기사, 마법사, 엘프, 성직자등의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던전 앤 드래곤즈2’가 모든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나는 원탁의 기사에 빠져 있었다. 그 놈의 별것도 아닌 엔딩을 보기위해 쏟아 부었던 용돈들. 그것도 모자라 부모님 돈에 손을 대기까지 하는 짓을 했었다. 그 놈의 원수 같은 원탁의 기사가, 아더왕이 뭐라고 그렇게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자면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 그래도 추측해보자면 그 시절이 그랬던 것 같다. 티브이에서 방영했던 만화 <원탁의 기사>들에 나오는 남자들만의 세계, 전설의 엑스칼리버를 뽑아 신의 선택을 받은 아더왕. 그리고 선의 기사들이 함께 힘을 모아 악의 무리들을 물리치고 어여쁜 왕비와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는 모습. 우리는 어린이었지만 남자란 이유로 마음에 불타올랐다.   




  『그라알 이야기』가 아더왕 이야기의 시초가 된 소설이라고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기대가 되었다. 12세기라는 정말로 오래된 고전이라는 것과 아더왕의 이야기인데 프랑스 작가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책장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책에는 아더왕이 주인공이 아니었다. 내가 머릿속에서 그렸던 이야기와는 사뭇 달랐다. 바보처럼 살았지만 그의 운명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기사가 되어버린, 바보 같지만 이보다 더 잘 싸울 수 없는 페르스발과 아더왕의 조카이자 최고의 기사 고뱅의 모험 이야기다.

  소설이지만 작가가 마치 모든 상황을 설명해주며 장면을 전환해 주어 무대용 대본에도 어울린다. 전투 장면과 잔인한 장면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굳이 묘사를 할 필요 없다며 요구하는 부분 또한 굉장히 인상적이며 후반에 갈수록 얽히는 관계에 관한 것들은 많은 재미를 주었다. 『그라알 이야기』는 위에서 말했던 대로 아더왕의 시초가 된 소설로 많은 뿌리로 뻗어있었고 몇 가지 버전으로 퍼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초역이라는 점에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삼국지’와 불교적 유교적 사상이 깃든 유명한 문학들이 익숙하듯 그들에게는 아마 아더왕의 이야기가 가까웠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그라알은 무엇인가? 그라알에는 성배라는 뜻이 있다. ‘성배’라는 단어를 들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떠올릴 수 있다. 성배란 뜻은 거룩하게 만들어진 커다란 접시같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오는 그라알 또한 화려하게 장식된 그릇으로 누군가에게 바쳐질 것이었다. 그 그라알이 어디로 가는 것이며 왜 그런 것이가에 대해 묻지 않아 저주를 받게 되는 페르스발. 마치 십자군의 기사들 위험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아더왕의 뿌리는 그리스도교적인 부분에서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켈트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그리스도적인 요소가 덧입혀 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법적인 이야기. 저주와 얽힌 운명 등에 대한 것이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온통 흥미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은 『그라알 이야기』가 미완성 작이라는 점이다. 카프카의 몇 작품들이 미완성임에도 사랑을 받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이 책은 가장 중요한 순간 이야기가 끝나버려 궁금증만 증폭시키고 말아버리는 아쉬움이다. 그라알에 대한 진실은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전승을 거둬가며 승승장구했지만 믿음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페르스발의 이야기가 어떻게 될 것인지, 숙명을 앞두고 대결을 펼칠 고뱅의 해피엔딩은 어떻게 이끌어질 것인지를 비롯해 수많은 이야기들이 묻혀 졌다.  




  『그라알 이야기』에서 파생된 작품을 흥미 있게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 작품들이 원조격 작품의 내용을 그대로 이어서 만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사실 그리 땡기지 않는다. 아무리 주머니에 지폐가 있더라도 동전이 없다면 게임은 이어질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또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의 욕구가 원하지 않는다.

   고전을 읽는 동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과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일까? 재미만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많이 버렸다는 것, 힘을 빼는 것에 충분히 만족했다는 사실이 나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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