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 오네긴 을유세계문학전집 25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김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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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심장, 그것은 뜨거운 갈망
예브게니 오네긴
알렉산드르 푸슈킨/ 김진영 옮김
을유문화사



  읍내라고 하기에도 초라하기 짝이 없는 어느 시골 이발소. 아귀가 맞지 않아 열고 닫기가 쉽지 않은 미닫이문 대신 발이 달려있는 그 안으로는 파리조차 보이지 않는 적막함이 흐른다. 파리 어느 근교를 배경으로 한 싸구려 풍경화 한 점이 액자에 담겨 걸려있고 세월을 짐작할 수 없이 바래버린 시구가 적인 종이가 벽에 붙어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위의 상황은 가상적 공간을 예로 들었지만 예전엔 정말로 푸슈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를 찾는 일이란 너무나 쉬었다. 어릴 적 학교 화장실과 공공기관 화장실 벽에는 푸슈킨의 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는 ‘삶이 그대를 속인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2003년 1월, 영하 20도와 30도의 경계가 무너져가는 강원도 철원의 한 훈련소건물에서 나는 푸슈킨을 만났다. 난생처음 지독한 추위를 맞이하는 경험보다 낡은 담장 너머의 것들이 견딜 수 없이 그리웠던 터라 나는 일부로 취침점오가 끝나고 30분을 기다렸다가 화장실을 갔다. 화장실 안에는 밤새도록 국군방송과 KBS1 라디오가 틀어져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5분에 한 번씩 문을 두드리는 불침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김범수의 ‘보고싶다’같은 노래를 들었다.

  폭설이 내려 조기기상이 밥 먹듯 이루어지는 날들 속에서도 육체와의 싸움이 아닌 속박에 대한 괴로움 때문에 몸부림치던 시절 나는 푸슈킨의 시를 저주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푸슈킨은 군대체험을 해보지 않은 놈이 분명하다. 나는 무의식적인 분노에 이런 생각 따위를 했었을 것이다.




  『예브게니 오게닌』의 첫 장이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천재적 면모가 글에서 들어나는 순간 군 시절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그가 일생에 가족을 이룬 적 없는 불행 속에서 살았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즐거운 나의 집’을 작곡한 헨리 비숍과 그를 헷갈려하기도 했다.

  1823년에서 1831년까지 햇수로만 9년이 걸린 이 작품은 ‘시로 쓴 소설’로 창작시간에 비한다면 짧다. 그러나 5천행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의 형식이 일정하다는 점 - 14행 소네트로, 4음보 약강격 운율과 고정된 각운 패턴 -을 본다면 그가 공들인 완성도는 실로 엄청날 수밖에 없다.

  반복되는 을유문화사 고전 작품에 의해 당시대에 유행했던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일정한 패턴으로 겹쳐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대학 시절 시(詩)에 발가락 조금 밀어 넣었다가 내뺀, 문외한인 나조차도 아름다운 그의 시구들이 보여 책장을 술술 넘어갔다.  

  오히려 소설에서 취하는 형식들이 잘려나간 채 내용을 정확하게 잡아주는 것이 내용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여전히 시에 대해 멀리 있지만 기존에 내가 생각했던 러시아 문학에 대한 이미지 - 숨 막히도록 길게 펼쳐진 눈 덮인 벌판 속에 이루어지는 인간의 탐구 -에 대한 것과는 너무도 반대되어 또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전히 무식하다는 점.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기껏해야 얼마 되지 않은 문화적인 것을 접해봤으면서 자료의 바다라는 틈에서 살면서 심심하면 거만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반성해야만 했다.

  넓은 세계로 달려가고 싶다. 많은 이들과의 관계가, 책이, 노래가, 영화가, 미술 작품이 내 안의 그 무엇이 꿈틀거리며 찾고 있다. 이제 그것은 이 전에 내가 바랐던 뜨거운 태양 아래의 정열적 블랙 파워와 라틴의 힘만이 아니다. 군 시절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부족한 잠과 싸워가며 굶주려 했던 문학에 대한 열망, 미처 보지 못했던 러시아 속에서 뜨겁게 피어오르는 하얀 심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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