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잇비 > 행복하세요. 바로 지금!

당첨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유난히 이런 '뽑기 운'에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걸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신청한 강연회였습니다. 그리고는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23일 오후에 도착한 문자 한 통. 당첨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었습니다. 

고려대학교를 가는 것은 두 번째였습니다. 처음 갔을 때, 옆으로 넓은 학교 부지가 어찌나 부럽던지. 찾아가는 길이 멀긴 했지만, 그런 멋진 학교를 한 번 더 본다는 설렘과 작가 공지영씨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두근거림이 상승작용을 일으켜서인지 꽤나 일찍 도착했습니다. 

 

(블로그에 올릴 사이즈로 편집한 덕에 사진이 좀 큽니다. 죄송합니다. ;ㅁ;) 

제일 먼저 나를 맞아 준 것은 강연회 알림 포스터였습니다. 학교 전체가 너무 조용한 탓에 '과연 강연회를 하긴 하는 걸까?'라고 순간 불안감을 가지게 만들었던 상황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사진을 꽤나 많이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덜 흔들린 건 이것 밖에 없었습니다. ;ㅁ;) 

   
  20대에 꼭 해야할 것. 코피 터지게 연애를 하세요. 코피 왜 터지냐면 걔 기다리느라고 그 집 앞에서 가서 밤 늦게까지 있다가 새벽에 와서 조금 자고 또 갔기 때문에 코피가 나는 거에요. 너무 보고 싶어서. 이런 연애를 꼭 하세요. (중략)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으세요, 진짜. 읽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다시는 이제 그런 세월이 오지 않아요. 그렇게 한가하게 책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없는데. (중략) 꼭 혼자서 먼 여행을 한 번 다녀오세요. 배낭을 메도 좋고, 무전여행을 해도 좋고. 혼자서 그 쓸쓸함과 낯섬과 고독과. 이런 것들을 안고 가면 정말 사람을 만나고 인생을 배울 수 있어요.  
   

나는 분명 20대에 있는데, 말씀하신 것 중에 하나도 제대로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20대의 시간 동안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해 보고자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이 생겼습니다. 저것만 제대로 실천해도 내가 투자한 책 한 권, 그리고 2시간 이상의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강연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작가님의 책을 가지고 온 사람들에게는 사인도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제 앞의 두 분은 작가님의 강연회에 참석하시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셨다며 사인을 받으셨습니다. 나는 "앞에 앉아서 자꾸 사진을 찍어대서 죄송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괜찮다며 웃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행복하세요. 바로 지금!'이라고 써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언제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는지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랬더니 퍼뜩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럼 내가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언제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전했는지 다시 고민했습니다. 역시나 답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행복하세요. 바로 지금!'이라는 문장을 한 번 더 읽으면서 강연회 내내 꺼놓았던 휴대전화를 켰습니다. 그리고는 몇 사람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행복하세요. 바로 지금!'이라고 말이지요. 

이 강연회에 많은 분들이 참가신청을 하셨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분들께 제가 전할 수 있는 것은 작가님께 얻었던 '행복하세요. 바로 지금!'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덧. 깃털은 다른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이 가볍습니다. 거기다가 '아주 가벼운'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고 해서 그 깃털이 더 가벼워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마음가짐의 문제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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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잇비 > 행복하세요. 바로 지금!



 

 

 

고려대학교를 가는 것은 두 번째였습니다. 처음 갔을 때, 옆으로 넓은 학교 부지가 어찌나 부럽던지. 찾아가는 길이 멀긴 했지만, 그런 멋진 학교를 한 번 더 본다는 설렘과 작가 공지영씨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두근거림이 상승작용을 일으켜서인지 꽤나 일찍 도착했습니다. 

 

(블로그에 올릴 사이즈로 편집한 덕에 사진이 좀 큽니다. 죄송합니다. ;ㅁ;) 

제일 먼저 나를 맞아 준 것은 강연회 알림 포스터였습니다. 학교 전체가 너무 조용한 탓에 '과연 강연회를 하긴 하는 걸까?'라고 순간 불안감을 가지게 만들었던 상황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사진을 꽤나 많이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덜 흔들린 건 이것 밖에 없었습니다. ;ㅁ;) 

   
  20대에 꼭 해야할 것. 코피 터지게 연애를 하세요. 코피 왜 터지냐면 걔 기다리느라고 그 집 앞에서 가서 밤 늦게까지 있다가 새벽에 와서 조금 자고 또 갔기 때문에 코피가 나는 거에요. 너무 보고 싶어서. 이런 연애를 꼭 하세요. (중략)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으세요, 진짜. 읽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다시는 이제 그런 세월이 오지 않아요. 그렇게 한가하게 책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없는데. (중략) 꼭 혼자서 먼 여행을 한 번 다녀오세요. 배낭을 메도 좋고, 무전여행을 해도 좋고. 혼자서 그 쓸쓸함과 낯섬과 고독과. 이런 것들을 안고 가면 정말 사람을 만나고 인생을 배울 수 있어요.  
   

나는 분명 20대에 있는데, 말씀하신 것 중에 하나도 제대로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20대의 시간 동안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해 보고자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이 생겼습니다. 저것만 제대로 실천해도 내가 투자한 책 한 권, 그리고 2시간 이상의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강연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작가님의 책을 가지고 온 사람들에게는 사인도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제 앞의 두 분은 작가님의 강연회에 참석하시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셨다며 사인을 받으셨습니다. 나는 "앞에 앉아서 자꾸 사진을 찍어대서 죄송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괜찮다며 웃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행복하세요. 바로 지금!'이라고 써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언제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는지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랬더니 퍼뜩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럼 내가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언제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전했는지 다시 고민했습니다. 역시나 답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행복하세요. 바로 지금!'이라는 문장을 한 번 더 읽으면서 강연회 내내 꺼놓았던 휴대전화를 켰습니다. 그리고는 몇 사람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행복하세요. 바로 지금!'이라고 말이지요. 

이 강연회에 많은 분들이 참가신청을 하셨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분들께 제가 전할 수 있는 것은 작가님께 얻었던 '행복하세요. 바로 지금!'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덧. 깃털은 다른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이 가볍습니다. 거기다가 '아주 가벼운'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고 해서 그 깃털이 더 가벼워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마음가짐의 문제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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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뒤늦게 은혼 13권을 주문하러 알라딘을 들어왔을 때, 보았다. 그녀의 신간이라는, 예약 주문을 하면 더 할인해준다는 내용의 이벤트창을. 아주 잠시 망설였다. 내가 유일하게 읽는 소설을 쓰는 작가. 슬픈 이야기임에도 날 울리지 않는 작가. 읽고 난 뒤에도 며칠이나 슬픔에 빠지게 하는 작가. 그런 작가인 그녀가 내는 새로운 책. 다른 것도 필요 없이 이젠 그녀의 이름만 보고도 책을 고를 정도가 되었다는 것에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더욱 슬픈 것을 찾는다는 생각 때문일까. 더 깊은 우울 속으로 끌여당겨지고 싶기 때문일까.

 

여자고등학교는 참 이상하다. 마음이 편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먹하다. - 손가락 中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편한 건 고등학교라는 울타리이기 때문일거고, 서먹한 건 울타리 속의 사람들 때문일거다. 사람들이 싫은 난 언제나 그렇게 느꼈다. 기쿠코처럼.

우리의 목소리는 어떤 류의 인사를 할 때면 제멋대로 요란을 떤다. 목소리와 감정은 별개다. - 손가락 中

전화를 할 때면 제일 많이 느끼는 것. 과연 내가 듣는 이 목소리에 그 사람의 감정이 담겨있는 걸까? 나는 내 감정을 목소리로 내뱉고 있는 걸까? 가면처럼, 표정을 가리기 위해 쓰는 가면처럼 감정을 가리는데 목소리를 쓰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늘, 새로 들어온 사람이 좋다. 같은 사람과 오래 사귀는 것보다 청결하고 마음이 놓인다. - 손가락 中

사귐을 청결하다 표현할 수 있다니. 오래 사귀면 때가 타고 더러워진다는 사실을 나는 문득 실감해버렸다. 그렇다고 나는 늘 새로운 사람을 사귈 준비가 되어있는 것도 아닌데.

유치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대체 '모두'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모두'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따돌릴 때 외에는. - 초록 고양이 中

나는 언제나 그래왔다. 모두에게 평등하게 친근해야 했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부분을 읽다가 느꼈던 건, 그러고 있는 동안 나는 따돌림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 따돌림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

"미안해."
 그 때 바로 뒤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에미가 미간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이런 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 잘 대해 주지도 못해서 미안해."
 심장이 터져나갈 듯 쿵쾅거렸다. 나는 거의 울 지경이었다. - 초록 고양이 中

이런 경험이 있냐고? 물론. 언제나 인연을 쳐내는 건 내 쪽이었기에 나는 항상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그러다보면 어느 새 상대방은 그 자리에 없었다. 단 한 명, 날 붙든 친구를 빼곤. 결국 그 친구는 날 울게 했었지. 끊임없는 회상 속에 잡힌 건 그런 것 뿐이었다.

일단 죽은 후에 다시 산다.
 그 말이 나의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일단 파괴한다는 것. 나 자신은 물론 주위까지.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알아버렸다. 파괴하면 돌아갈 장소가 없어진다는 것을. - 사탕일기 中

자신이 없다. 과연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돌아갈 장소도 없이 그렇게 혼자일 수 있을까. 나는 모순적인 인간이라 그렇게 못할 거라고 단정지었다.

그러고 있으면 굉장히 안심이 된다.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러고 있으면 나만의 세계에 있는 셈이다. 이어폰에서는 스피츠(Spitz)가, 다시는 좋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 모든 것, 이라고 내 귀에만 속삭인다. - 사탕일기 中

많은 사람들 속에서, 흔히들 말하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것을 느낄 때 나는 그것을 즐기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혼자 다니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누군가와 잡은 손을 놓아버린다. 안심이 되냐고? 글쎄. 그건 나도 아직 잘 모른다.

 

『반짝반짝 빛나는』, 『울 준비는 되어있다』, 『도쿄 타워』는 책을 덮는 순간 남아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었다. 언제나 그녀의 책은 그랬기에 이번만은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차마 책에 줄을 그을 수 없어 포스트 잇을 붙여가며 표시했다. 막연하게 슬픔이 그리울 때 다시 펼 수 있게. 혹여 이렇게 리뷰를 쓸 마음이 생기면 다시 읽을 수 있게. 하지만 왠 걸. 그녀는 언제나처럼 나에게서 감정이란 녀석들을 모두 빼앗아갔다. 여기에 쓰지 못한 부분에도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무얼 쓰고 싶었는지 이미 잊어버렸다. 이래서 나는 그녀의 소설을 읽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녀도 모순적인 인간일까.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인간인 나를 빠져들게 만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 마치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처럼 읽고 또 읽고, 결국은 중추 신경을 점령해버린 그 무언가 때문에 정신까지 놓게 만드는 것일까.


불행한 여고 시절을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책 속의 그녀들도 그러할테니까. 나도 그녀들처럼 조금 다른 추억을 남겼을 뿐이니까.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나는 조금 더 우울할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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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 시절, 언젠가부터 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6 * 25 기념 글짓기’ 혹은 ‘6 * 25 기념 웅변대회’였다.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 시절엔 그저 지나치는 하루 행사였고, 초등학생인 그 누구도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무엇을 썼고, 무엇을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사실은 빼놓지 않았다. 그 땐, 공산당이 무엇인줄도 몰랐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흡수 통일을 언급하곤 했다. 우리나라가 잘났으니 못난 북한을 감싸서 통일해야 한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담임선생님들은 그런 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 런지 궁금해진다. 그네들도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을까, 아니면 이런 식의 교육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꼈을까. 지금에서야 알 길이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어느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내고 왜곡해버린 역사란 뜻이다. 이런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런 역사를 가르치고 배운다.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본다. 이런 말은 잘못된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전쟁과 사회』는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그 이상을 풀어놓지는 않는다. 다만, 책을 읽는 독자들이 그것을 스스로 깨달아 주길 바라고 있다. 왜곡된 역사를 부정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1장 즉, 서론의 옆에는 ‘또 다른 전쟁’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읽으면서 나는 왜 ‘6 * 25’라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보지 못했는지 내 스스로에게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을 구하려 노력했다. 내가 나름대로 내릴 수 있던 답은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아주 철저하게 통제되어서 나로서는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에서 내리고 있는 이 결론은 나를 위로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한 듯 보였다. 그렇게 치부해버리기엔 내가 아직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숨겨야만 했고 혹여 알려질까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나를 숨조차 쉴 수 없는 암흑으로 몰아넣었다. 그곳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그저 빛을 바라지도 못한 채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말하지 못하는 공포와 말해선 안 되는 현실이 그들을, 그리고 또 그들과 공유하기 시작한 나를 그렇게 둘러쌌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가치 판단이 섞여서도 안 되는 것들이다. 그것을 필자는 이때까지 쌓아 놓았던 탑을 무너뜨리면서 시작했다. “전쟁 중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은 전쟁 후 한국정치에 어떻게 반복, 재생산되었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이들에게 말 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필자는 너무나도 중립적인-어쩌면 사회학적인 의미의 6 * 25를 서술하다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태도로 전쟁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국가와 국민이 형성되는 토대로 존재하는 한국전쟁으로서, 새로운 정치사회의 질서를 구축하는 촉매제로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료의 부족함을 언급한다. 그렇게 중립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고, 누군가에게서 언급되는 것도 막았으니 별로 놀라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적은 자료에서 모순과 불일치 등을 찾고 사실을 재구성하면서 조금씩 깨진 파편에 불과하던 전쟁사를 끼워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충격과 놀라움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구를 깨어버렸다. 아니, 필라멘트가 끊어져 버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전류는 꾸준히 통하고 있었음에도 빛을 낼 수는 없었다. 그 옆에 새로운 전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직 모양을 알 수 없는.

 피난사회에서는 모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모두가 피난지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서로를 대하며, 권력자와 민중들 모두 어떤 질서와 규칙 속에 살아가기보다는 당장의 이익 추구와 목숨 보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서로 버스를 먼저 타기 위해 다투고, 차를 앞질러 가기 위해 경적을 울리며 다투는 오늘날 한국인들의 행동은 서울발 마지막 열차를 타기 위해 아우성치거나, 1 * 4후퇴 당시 흥남부두에서 떠나는 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50년 전 피난민들의 행동과 과연 얼마만큼이나 다른가? (본문, 65p.)

 영화 한 편이 스쳐지나간다.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 속의 모습 그대로를 담은 것만 같은 구절이다. 서민들에게는 당장 살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떠나느냐, 남느냐’ 사이에서 고민하던 사람들은 후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남한의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휴전선 주위에서는 산발적인 전투가 끊이지 않고 있었고, 전면전이 발생할 가능성 역시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대규모의 인사이동이나 장병의 외출, 휴가, 장교클럽 개관식 등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군 수뇌부의 말도 안 되는 명령이나, 결의조차 지켜지지 않고, 이승만의 침착함을 지나친 무반응은 국가나 국민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는 나에게 경멸 이상의 감정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특히 책장을 넘길수록 이승만이 전쟁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생각만 한 듯 했다. 자신에게 기회이자 위기인 그 순간을 그는 최대한 활용하려는 것만을 고려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험한 세파를 겪은 이들이 얻은 지혜는 강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가슴 아픈 말이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강한 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라니. 하지만 민중들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양 쪽 모두에게 적당히 동조해야 하고, 순간 마다 다른 판단을 해야 하는 민중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최고 책임자인 이승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에게는 낙관적인 상황이라 거짓을 알려주었다. 나에게 유교적 군주관이 지나치게 확립되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승만이 혼자 무책임한 행동을 한 것은 국민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만 같다. 적어도 나는, 그가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이상 국민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주적으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미국에 기대어서 한강 다리를 폭파해가면서까지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 했다는 사실은 그가 대통령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게끔 만들었다.

 국민들은 그렇게 자신의 지도자를 잃은 채로 어떤 것을 할 수 있었을까. 이승만을 비판하며 수도를 지키던 국회의원들도 있었다. 민중들은 더 이상 국가가 자신들의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피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이기주의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었으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도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희생양의 정치. 이승만 대신 많은 관료들이 그 짐을 안고 죽어갔다. 그리고 모든 비난의 화살은 그네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과 미국의 늦은 원조가 전쟁의 피해를 크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국가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정권이었으므로 미국의 군사적 원조가 필요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상황을 개선시키려는 국가 차원의 노력을 하지 않고, 미국의 원조에 일방적으로 기대기만 했다. 결국 이러한 과거는 현재까지 미국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만드는 데 한 몫을 하게 되었다. 도대체 근대 자주적 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는 어디로 간 것인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은 점령당했다. 약 3개월 동안 서울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인민민주주의’ 국가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독립 직후에 생겼던 것처럼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기 시작하였고, 선거를 서둘렀다. 이 선거에 친일분자나 친미분자는 제외되었다. 남한의 선거보다 더 진보적인 것처럼 보이는 북한의 선거는 단일 입후보의 흑백함 선거였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기권할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민주적’이라는 주장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저 형식상으로만 주권이 인민에게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남한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듯 보인다.

 토지개혁도 시행되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원칙에 의거하여, 경기도부터 시작된 토지개혁은 빈농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당 주도의 하향식 토지개혁과 무리한 계급 투쟁적 성격을 가졌기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지주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농민들을 근대적 주체로 형성시키지는 못한 것이다.

 고등학교 한국 근 * 현대사 수업 시간에 토지개혁에 대해 배웠던 부분이 생각났다. 남북한이 서로 다른 방법으로 토지개혁을 했고, 북한의 토지개혁이 좀 더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 눈에 비친 현실은 비단 그렇지만은 못했다. 어느 쪽이 딱히 더 좋은 방향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서울이 점령되면서 북한은 반동분자를 숙청하기 시작했다. 인민재판이 곳곳에서 열렸고, 감금과 처벌이 이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생과 사의 결정이 이념적 기준에서가 아니라, 사적이고 우연한 요소에 좌우되기도 했다.

 남한 역시 서울 수복 후에 부역자를 처벌하였다. 피난을 갔던 사람이나, 가지 않았더라도 부역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간주되었고, 부역을 한 사람들은 빨갱이의 낙인이 찍힌 채,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연좌제 때문에 본인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까지 화가 미쳤다.

 전쟁은 군인을 지배자의 위치로 승격시킨다. 제정 집행의 절차는 무시되고 무조건적인 복종만 있을 뿐이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전시체제에 부합하는 기관으로서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전시동원령’을 통해 수많은 의용군들이 반 자원 반 강제로 모였고, 뒤따라 인민군 원호 사업도 실시되었다. 이러한 전시 동원정책은 토지개혁에서 의도한 지지 기반의 확대정책과 상충되었다. ‘인민’을 위한다는 전쟁의 명분은 점점 퇴색되었으며, 많은 생명과 재산은 모두 한 쪽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남한 역시 많은 사람들을 징집하였으며, 전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관리들 때문에 징집된 이들조차 포로 취급을 받으며 죽어갔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가? 이전의 교육에선 당연히 ‘북한은 그르고, 남한만이 옳다’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어떤가. 양 쪽 모두 다수의 민중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정립해야만 했는가? 그래서 그 전쟁이 끝난 후에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정립되었는가? 결과를 위해 정당화될 수 있는 희생이었나? 이 모든 물음에 나는 아니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다.

 신격화된 국가는 과연 민중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무조건적인 신도가 되기를 요구하며, 그 믿음을 강요한다. 다른 신을 믿는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이러한 이유로 죽음으로까지 내몬다. 민주주의. 형태가 어떠했건 간에 민주주의라면 과연 위와 같이 할 수 있는 것인가? 개인의 자유와 의지는 없고, 오로지 국가라는 신을 위한 일방적인 숭배 의무만 있을 따름인 이 전쟁에서 과연 민중들은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대량 학살이란 정당한 법적 절차나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 국가권력 및 그와 연관된 권력체가 정치적 이유에 의해 자신과 적대하는 비무장 민간인 집단을 일방적이고 의도적으로 살해하는 것” (본문, 205p.)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어떻게 ‘국가권력 및 그와 연관된 권력체’가 ‘자신과 적대적인 관계’라는 이유만으로 ‘비무장 민간인’을 ‘집단’적으로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전쟁이 학살이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환경을 조성해준다고 해도 이러한 학살의 정의는 나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제주 4 * 3 항쟁과 관련된 비디오를 시청하면서, 나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네들이 숨기고 살아야만 했던 세월의 아픔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상이 다르고, 국가가 원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사람도 있지만, 전혀 관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총살된 많은 사람들이 내 곁으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지리산 주변에서는 유격대의 산발적인 공격과 우익의 살해에 맞선 보복작전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이는 마치 그 지역의 모든 주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취급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느 국가가 자신의 국민을 신뢰하지 못한 채, 적으로 몰 수 있단 말인가.

 남한에서는 좌익사범을 전향시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게 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 직후, 그들이 북한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다. 그네들은 모이라는 말을 듣고 단순한 사상교육 쯤으로 생각하고 의심을 갖지도 않았다. 그리고 모인 그 자리에서 죽어갔다.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협력할지의 여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설사 협력한다고 해도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될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하고 있었던 총부리는 방향을 바꾸지 않았고, 그대로 방아쇠는 당겨졌다.

 그 보도연맹원들 중에는 그저 주위의 권유나 강압으로 가입했던 사람도 있었고, 비료나 식량을 얻기 위해 손도장만 찍었던 사람도 있었다. 제대로 심사조차 하지 않고 가입시켜 놓고서는 마찬가지로 검토조차 하지 않고 죽였다. ‘살해’라는 단어의 무게가 이렇게 가볍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심지어 만화책을 볼 때도 느끼지 못했을 정도의 가벼움이었다.

 ‘국가 건설’을 위한 ‘빨갱이 청소’라. 그럼 한 번 다시 묻고 싶다. ‘빨갱이’라는 이름 아래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국가’를 누릴 정도의 조건도 갖추기 못한 것인가. 그럼 가족이 ‘빨갱이’였던 더 많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국가’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인가. 그렇게 해서 건설된 ‘국가’는 과연 남은 국민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사실 그 누구도 답해줄 수 없는 물음이다. 내가 이렇게 계속해서 묻는 물음들은 단지 역사에 거는 태클일 뿐이라는 사실은 내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 대해 무수한 회의 밖에는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아직 감추어진 비밀들은 남은 당시에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까지 옥죄어오고 있다.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 되었고, 벗어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는 올 수 있는 것일까. ‘평화통일’은 장애물을 넘을 수 있을까.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다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모두에게 알리고, 국민이 국가의 정체성을 바르게 확립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상대에 의해 대립 관계에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어야 하고, 상대를 일방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장애물은 조금씩 소실되어 갈 것이다.

 보고서를 쓰기위해 중앙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을 더 빌렸다.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저자는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기 위해 ‘한국전쟁’이라고 명명한다고 말한다.

 필자는 이 전쟁은 시작되어서는 안 될 전쟁이었지만 시작되었고, 끝나야 했는데도 끝나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끝나야만 하는 전쟁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참고문헌, 9p.)

 맞는 말이다. 저기에서 틀린 구절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내 성향 상 ‘단’ 한 군데 지적하고 싶다. ‘극복’ 물론,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힘든 세월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극복이란 것은 무언가 부족하단 느낌이 든다.

 한국전쟁 : 한반도는 외세의 힘에 의해서만 분단되었는가? 우리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는가?

 한국 현대사 : 한국군 전체의 5%를 동원한 5 * 16 쿠데타의 성공은 미국의 방조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의 잘못 때문인가?

 현재의 한국 사회 : 한국의 대외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 것인가? 외세에 의해 분단되고 세계 냉전이 한국전쟁의 한 요인이 되었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외세를 비난하고만 있으면 대외관계 문제가 모두 풀리는가? (참고문헌, 382p.)

 수업시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느 정도 학습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관점을 만들고 다시 역사를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과제는 그 관점을 적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 같다.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모든 견고한 것은 공기 속에 사라지고. 막스 베버가 한 말이란다. 사회학 입문 시간에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근대 자본에 의해 고대, 중세의 것들은 사라졌다고. 나는 필기를 하다가, 순간 펜을 떨어뜨렸다. 견고한 것조차 공기 속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나를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형체도 없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 이렇게 방관하고 있는 ‘한국전쟁’은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두려워졌다. 이제야 아주 일부분을 알았을 뿐인데. 아직 태클을 걸었던 ‘극복’조차 하지 못했는데. 내가 생각하는 맨 마지막 단계까지 다다르지도 못했는데.

 내재화. 가장 필요한 것이다. 단정 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감히 단정 지으련다. 단지 ‘극복’해서 사라지게 만들 것이 아니라, ‘내재화’해서 영원히 안고가야 한다고.

 황석영의 소설 『손님』을 꽤나 어릴 적에 읽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몇 번이고 포기했다. 이제야, 그 혼령들의 마음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다. 그리고 그 소설 속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다. 나도 내재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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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시작은 연암이었으나, 끝은 열하였던 이야기.

 

 

 수능을 치고 얼마 지나지않아 대형 서점을 갔을 때, 이 책을 봤었다. 열하일기라. 국사 수업시간에 박지원의 저서라는 것만 배웠고, 문학 수업시간에 일야구도하기 정도만 배웠다. 욕심이 생겼다. 열하일기를 모두 읽을 자신은 없었고, 출판사의 의도대로 리라이팅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갖고 싶은 맘을 억누르며 나는 서점을 그렇게 나왔다. 언젠간 저 책을 읽겠다는 다짐과 함께.

 

 한참 힘들었다. 대학이란 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었으니. 그 때, 머리도 식힐 겸 책이 읽고 싶어졌다. 무슨 배짱인지 4권을 질렀다. (책 값은 5만원 가량 되었다.) 그 때, 이 책이 떠올랐다. 기억 속을 헤집어 나는 이 책을 선택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읽기 시작한 시기가 시험 기간인 관계로 끝까지 읽을 순 없었지만,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단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렇게 방학을 맞았다.

 

 집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처음은 열하일기의 내용보다 인간 박지원을 더 배려한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이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으로서의 박지원. 단순히 열하일기의 내용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떠했는지, 그가 열하일기를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느꼈는지를 알고 싶었다.

 

 박지원의 초상화. 가늘게 뜬 눈, 우람한 풍채, 흰 수염. 난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청렴결백한 선비의 모습부터, 장난스럽기까지 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연암 박지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열하일기. 단지 쪼개져 배웠던 것이 싫어 도전한 책이었다. 그리고 나는 작가가 재구성한 열하일기를 따라 가면서 연암과 함께 걷고 있었다. 중국의 광활한 대륙과 수많은 강을. 그리고 연암과 함께 그 순간 순간을 느끼고 있었다.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사람들을.

 

 『 내가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더욱 병통이 되는 것임을. 이제 내 마부가 말에게 발을 밟혀 뒷수레에 실리고 보니, 마침내 고삐를 놓고 강물 위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올려 발을 모두자, 한번 떨어지면 그대로 강물이었다.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아 마움에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고 나자, 내 귓속에 마침내 강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을 건넜으되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마치 앉은 자리 위에서 앉고 눕고 기거하는 것만 같았다. 』

 

 잘 아는 '일야구도하기'의 절정이자 대단원이다. 어쩌면 이것이 조선시대 선비가 갖춰야 할 가장 바람직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모든 것이 썩어갈 조선 말, 연암은 홀로 그것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는 누구에게 채찍을 가하고 싶었던 것일까. 끝없이 이어지는 물음들을 해결하기엔 내가 너무 모르는 것이 많다고 느낀다. 이제 그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려고 노력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연암으로부터 시작해서 열하로 끝난 이야기는 나에게 하고 싶었던 것에 대한 열정과 현재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해 주었고, 여기 있는 나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 연암은 나에게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지 말라고.

 

  연암의 이야기가 다음 책의 리뷰에도 계속 등장할 것 같다. 분명 그는 내가 여기서 한 번으로 다 언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럴 욕심조차 없으니.

 

 행복했다. 연암의 여행을 따라가는 동안, 연암이 겪었을 위험천만한 일들을 보면서도 나는 그저 빙긋이 입가에 머무는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이게 작가가 말하는 열하일기 속에서 범람하는 유머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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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0 16:59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