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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프라하,함흥 ㅣ 문학동네 시집 29
이홍섭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홍섭은 삶을 거칠게만 노래하려 하지 않는다. 거칠고 욕되어도 그 삶을 껴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시인의 생업으로 여기는 듯 하다. 자세히 바라보면 삶의 거치름 뒤에 따뜻함이 있고, 욕됨 뒤에도 유순함이 있다. 삶이 거칠고 힘들다고 노래하는 시인이 어디 한 두사람이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따스하게 길들이고 갈무리하고자 노래하는 시인이 몇 안되는 요즘, 그 몇 안되는 이들 중의 한 사람이 이홍섭이다.
우선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그리고 말하는 분위기도 존재의 그윽한 내면 세계를 담고 있다. 그의 따뜻한 시선과 그윽한 목소리는 그만큼 그의 삶의 인식이 깊고 넓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삶에 대한 그의 이러한 인식의 밑감정은 다름 아닌 삶에 대한 연민에서 기인한다. 그는 연민의 감정을 일상성의 공간과 자연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연상시키며 체화해내지 않은날(生)감정의 상태의 것으로, 혹은 득도적 삶의 한 단면으로 구사해 낸다.
다만, 지나간 삶이/ 지금 지나가는 그늘만하겠다는 생각을/ 어느 다 자란 느티나무 아 래서 해본 적이 있다 (그늘, 그늘)
철새를/ 지상에서 밀어올리는 힘은 /팔 할이 연민이다/ 그 어떤 힘도 /경포호에서 추운 //시베리아로 /철새를 날아가게 할 수 없으니 //저 외로운 날개 밑에는 /얼마나 많은 연민이 숨어 있는가 (철새는 날아간다 전문)
그러면 여기에서 시인 이홍섭이 지니고 있는 따뜻한 시선과 삶에 대한 연민이 적절히 녹아 있는 시 한편을 가지고 그의 시세계를 함께 읽어보도록 하자. 다음은 '시인 이솝씨의 행방 6'의 전문이다.
지나가는 구름이 가엽고 / 내 마음이 솜틀같을 때가 있다 /입을 열면 뭉게뭉게 떠다니는 말들, 알 수 없는 / 연민과 슬픔 따위
나는 물밑 세상을 너무 많이 보았구나 / 투명한 얼음 밑으로 환히 떠다니는 고기떼 / 잡지 않고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던 추운 겨울날들
우선 이 시는 1행의 시작부터가 읽는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구름이 가엽다는 인식의 근저를 보여주지 않고 즉흥적인 시상 전개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구름이 가여운가. 그것은 이미 그가 자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갈 수도 다가갈 수도 없는 불구의 사랑(삶)에 대한 연민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름이 가엽고, 내 마음은 가여움의 근저가 된다.
솜을 뜯어서 부풀리는 기계처럼 입을 열면 자꾸만 부풀어오르는 연민과 슬픔은 의미의 접근을 유보시키는 존재론적인 것들이며, 시인에게 입을 여는 행위는 결국 시작품을 얘기하는 것이고, 이것들은 그의 시가 연민과 슬픔에 얼만큼 경도 되어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2연의 첫행은 '나는 물밑 세상을 너무 많이 보았구나'라고 시작한다. 물밑 세상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2연 역시 1연과 똑같은 식의 전개를 구사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즉각적인 이해를 거부하고 그 다음 행을 넘어서야 다다를 수 있는 시적 공간을 확보해 나가는 이홍섭의 수법 말이다. 그래서 얼음 밑의 고기떼는 투명한 슬픔과 같은 연민의 변주임을 확인하고 나서야, 물밑 세상이 결국 시인이 바라보는 일상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연민과 슬픔을 얻어내기 위한 시인의 '거리'이다. 연민과 슬픔이라는 것은 기쁨이나 즐거움의 것들과는 달리 사물이나 사건과의 직면 상황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한걸음쯤 물러서서 감정을 추스릴 때 얻어지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의 절제가 시집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음도 쉽게 알 수 있다. 열띠고 현란한 몸부림만이 마치 무슨 구원이나 되는 듯이 난무하는 이 즈음에 이처럼 차분한 호흡으로 일상과 존재의 내면을 넘나드는 시인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