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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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김 훈의 <칼의 노래>를 읽고 그 문장의 현란함에 빠져있을 때

그 다음으로 박범신의 <고산자>를 읽으려고 했었다.

너무 싱거워서 재빨리 접어버렸었다. 

그 영향력이 거의 사라져버린 지금 <비즈니스>를 읽으니 이제서야 문장의 담백함이 느껴진다.

부드럽게 흐르는 듯, 영상이 보이는 듯 하다고나 할까.

어쩌면 주인공이 내 처지와 비슷해서 공감이 가서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박범신 소설은 처음으로 읽었다.

소설을 즐기는 편도 아니고, 게다가 남성작가의 글을 그닥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인 듯.

 

 

<비즈니스>의 주인공은 서른 아홉의 아줌마. 1인칭 시점이다.

가끔 회상하는 듯한 문장으로 인해, 세월이 더 느껴졌다.

난 내 나이가 많다고 생각되질 않는데, 참 여러 군데서 '마흔 = 나이 듦' 공식을 접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마흔은 '본문의 끝'일까? 

마흔 셋 나이에 열 일곱 소녀에게 프로프즈 거절 당한 개인적인 상실감 아닐까?

우리 세대는 80세도 훨씬 넘게 살거라고 하는데, 이전 시대의 고정관념을 지금까지도 굳건히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젊음에 대한 지나친 강박인 것만 같다.

 

어쨌건,

소설은 'ㅁ시'라는 가상 도시에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삶을 비교/대조하면서 시작한다.

진보인사로서 도시 개발을 전면에 내세워 재선에 성공한 시장은 스스로를 '비즈니스맨'이라 부른다. 

또한, 신시가지 문화권에 삶을 유린당한 남주는 도둑이란 '비즈니스'를 하고,

딸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몸을 파는 여주는 '비즈니스우먼' 이라 자칭한다.

 

여주는 철저히 착복당하면서도 신시가지의 삶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려 애쓰다가,

우연히 구시가지의 가슴 따뜻한 인간다운 삶을 접하고는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허무했던 가짜 삶을 버리고,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천민자본주의사회에서 강남/강북의 양극화된 삶을 소설의 재료로 삼은 것이다.

 

홍보글에는 박범신의 문학적 변신을 엿볼 수 있는 책이라 소개하고 있고,

작가는 이런 식의 현실 비판적인 이야기가 우리 문학계에 거의 실종상태라고 말한다.

정말?

뉴스에서, 토론 자리에서, 온통 이 나라가, 세계가 왜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지 개탄하고 있는데

문학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작품화되지 않고 있단 건가? 모를 일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적'은 자본, 돈에 휘둘리는 세계다.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우리 일상을 무겁게 받치고 있는 무형의 적...

이 책을 읽었다 해도,

주인공의 변화에 박수를 친다 해도,

여전히 나는 적을 어떻게 무찔러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무작정 신시가지가 정한 법칙을 따라가지 않으려 의식적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신시가지문화, 자본 논리가 설득하는 대로 따라가지 말라는 교훈으로 만족해야 할까.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이란 누구나 볼 수 있는 데 걸어놓는 문패 같은 거야. 문패는, 지금 걸던 대로 걸어. 그 대신 남몰래 돈 벌어 정우 뒷바라지라도 잘해. 요즘 애들이 진짜 싫어하고 혐오하는 부모는 실패한 부모야. 아이 뒷바라지 못해주는 부모 말야. 나중에 정우가 좋은 대학도 못 가고, 그래서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을 때, 엄마는 내게 무엇을 주었느냐고 너한테 물으면 뭐라고 할래? 과외조차 안 시키고 외국어고 갈 것 같아? 어림없어 얘. 신시가지 아파트 사는 애들은 주말이면 서울에 있는 영어 학교까지 엄마들이 실어 나르고 있어. 넌 정숙한 좋은 어머니상(像)이니, 그걸 계속 네 문패로 사용해. 그 대신 눈 질끈 감고 다른 각도로 세상을 봐. 처음만 지나면 모든 게 쉬워져. 정우를 네 신랑처럼 살게 하지 않으려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니. 자식을 두곤 결과적으론 남는 장사를 해야 한다 그거야. 안 그러면 너, 정우한테 나중에 원망받아!”

--- pp.62-63

 

명문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을 학습의 로봇으로 만드는 부모가 최상의 부모였다. 그녀 말대로 투자와 견줘 최상의 부가가치를 내는 게 교육의 목표가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 겨우 주민등록을 옮겨 신도시 중학교에 진학시키는 것 정도는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을 서울로 보냈다. 아예 미국이나 유럽으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외고, 서울대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단계, 그 너머의 또 다른 특수한 곳에 존재했다. ... 그런 아이들은 자신이 '성골'이라고 믿었고, '귀족'으로 성장했다. 귀족으로 성장해 돌아오면, 부모들이 가진 재산이나 기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어라 공부해 외고, 서울대를 나온 가난한 집 수재들이 그들의 고용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정우처럼 가진 것 없는 집 아이들은 그들 귀족의 명을 받고 그들의 재산을 더 불리는 전사로 키워지고 있는 셈이었다. 부의 세습적 구조는 날이 갈수록 오히려 깊어졌다. 그리고 그런 구조는 전선조차 뚜렷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세계적이었기 때문에, 뿌리치거나 깨부술 방도가 전무했다. 뿌리치면 실패자로 세상 끝까지 밀려나야 했고, 깨부수려 하면 감옥에 가야 했다. 그러니,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귀족의 전사가 되는 길을 쫒아갈 수밖에 없었다. --- pp 128-129

 

사실, 이런 식의 현실 비판적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 ‘문학판’에서도 거의 실종 상태에 놓여 있다. 현재진행형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삶의 사회구조적 문제들을 ‘문학판’에서 오히려 유기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래도 좋은가. 우리네 삶을 몰강스럽게 옥죄는 전 세계적 ‘자본의 폭력성’에 대해, 문학은 여전히, 그리고 끈질기게 발언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지난봄 나는 ‘갈망의 삼부작’으로 명명한 마지막 작품 『은교』를 펴낸 바 있다. 최근작 『촐라체』, 『고산자』, 『은교』에서는 삶의 본원이라 할 존재론적 슬픔이 우선적으로 고려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어스레한 골방에서 존재론적 슬픔과 만나고 있을 때에도 우리를 둘러싼 반인간적 세계 구조는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었다. 피 튀기는 ‘저잣거리’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내가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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