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퇴일기
탈학교모임친구들 지음 / 민들레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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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청소년들은 더 이상 억압적이고 모순적인 학교의 틀을 참지 않고 다른 길을 찾고 있다. 그들은 학교 밖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민들레 출판사에서 나온 <자퇴일기>는 학교자퇴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특히나 학교교육을 받는 것과 자퇴를 하는 것을 패키지 여행과 배낭여행의 비유는 매우 인상적이다. <자퇴일기>에는 자퇴생들의 고민과 생각들이 잘 드러나 있다. 자퇴를 한 아이들은 그들의 결정에 대해서 만족해하며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학교를 나와서 다행'이고 '학교를 나와서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들 대부분은 부모님의 반대와 선생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퇴라는 목표를 어렵게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자퇴를 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학교 밖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다.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학생'이란 신분은 일종의 울타리이다. 자퇴를 한다는 것은 그 울타리 밖으로 스스로 뛰쳐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퇴생들이 겪는 어려움 중 하나는 우선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친구들이 학교 다닐 시간에 동네 슈퍼에만 가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어른들. 학생증도 주민등록증도 없어서 신분증을 요구받을 때 당하는 낭패. 이런 사소한 일들에서부터 취직, 결혼 같은 큰일들까지 자퇴경험자들에게는 괴롭고 불리한 상황이 많이 있다.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졸업장이 없다는 것, 따라서 다른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학연이라는 문화자본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 역시 현 상황에서는 이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사회 부적응자', '현실 도피자', '날라리', '왕따', '싸이코', '문제아'란 딱지를 자신의 실제 모습이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달고 다녀야 하는 것도 현실이다.

이렇게 사회로부터 받는 불이익 말고도 개인이 극복해야 할 어려움도 적지 않다. 학교라는 틀에 이미 길들여져 버린 아이들은 자신들이 그 틀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틀에서 습득한 규율을 벗어버리기에 힘들어한다. 자유를 선택했다는 데서 오는 책임감도 그렇지만, 학교가 시키는 대로만 해왔던 아이들이 갑자기 너무 많은 자유시간에 적응하고 그것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자퇴를 하고 나와서 할 일없이 빈둥거리다가 폐인 같은 생활을 하기 쉽고, 대단한 의지와 결단력, 확실하게 이끌어주는 것이 없는 이상 흐지부지하게 보내기 쉽다.

거의 모든 청소년들은 학교에 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않는 자퇴 경험자들은 또래 친구를 사귈 기회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자퇴 경험자들이 갈만한 문화공간이 많으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공부하느라고 바쁜 학교 친구들은 만나기가 쉽지 않고 친구가 없는 외롭고 쓸쓸한 상황 때문에 자퇴한 것을 후회하는 경우도 생긴다. 어렵게 자퇴라는 결정을 내리고 자퇴를 하는 과정 자체도 쉽지 않지만, 자퇴가 끝은 아니다. 자퇴생은 놀고 싶어서 학교를 나온 게 아니다. 수업 공동화 현상을 생각해 본다면 도리어 학교가 놀기에는 더 편하다. 자퇴생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있을 뿐이지 '틀린'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조금 다른 방법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다.

자퇴를 하고 상당수의 학생들은 검정고시를 보거나 수능시험을 준비한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실업계로 전학하는 경우도 있으며, 방송통신고등학교로 다시 입학하는 경우도 있다. 그 과정에서, 혹은 학업과는 별개로 같은 자퇴생끼리의 연대도 이루어진다. 인터넷 상에서 의견이나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한다. 자퇴생들은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자신의 미래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살아가는 공간만 다를 뿐 보통 청소년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자퇴일기는 이러한 자퇴생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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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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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현재 대두되고 있는 인간복제 및 생명공학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생각해보아도 좋을까? 생명공학을 둘러싼 문제는 항상 어렵다. 과학기술을 이용해서 생명복제를 꼭 해야 돼? 아니, 환경을 걱정한다고 해서 과학을 전적으로 포기해야 하는거야? 인간은 과연 같은 인간을 복제할 수 있나? 윤리적으로든, 기술적으로든. 인간복제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불임부부에게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는 하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몇 십년 차이가 나는 일란성 쌍둥이에 불과하다는데? 개체복체와 배아복제는 또 어떤 차이가 있는걸까? 각종 기사와 문헌들에서 자세하고도 시끄럽게 떠들어대기는 하더군. 근데 이게 다 무슨 얘기인거지?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복제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렇지 않은 척 하지만 나는 인간복제의 반대자들이 제시하는 인간복제의 역기능을 모두 인정한다. 그리고 과학기술로 인해서 야기되는 위험성(유전적으로 돌연변이가 일어날 수 있다거나, 수명에 문제가 있다는 등)이 모두 제거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생명복제를 반대할 것이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어떻게 생각하면 참 근거없는 생태계의 조화와 자연의 질서라는 윤리를 믿는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개입했을 때 생기는 부정적 효과를 우려하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동물들 간의 관계에서 약자일 수 있는 초식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이 육식동물을 죽인다면 그걸로 생태계 전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의학의 발달로 인해 사람이 150년을 살 수도 있다는데, 어휴 끔찍해라. 150년이나 살아서 뭐에 쓸려고, 그 사람이 살면서 일어날 자원의 부족과 환경오염의 문제는 생각안하나부지? 아, 의학이 그렇게 발달했는데 다른 과학기술은 발전안하겠냐구? 결국은 과학기술이 모든 걸 해결해줄거라구? 꿈꾸고 있네.... 난 이렇다.

어쩌면 나는 생태학자들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져 왔던 걸까? 예전에 읽었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표현된 세계는 그 자체로 공포였다. 어쩌면 헉슬리도 생명공학에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를 가졌을 뿐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유전공학은 인류의 식량산업에 선구적인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그 유혹을 떨쳐버리기에는 그것이 너무 매혹적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가난한 사람들이 식량이 부족해서 못먹었던 것일까? 한 국가에서는 상층 계급이 사회의 대부분의 재화를 독차지하고 있고, 세계 차원에서 볼 때 몇 안되는 선진 국가들이 지구 자원의 7-80%를 차지하고 있는데? 제 3세계 국민들이 식량이 부족해서 굶고 있다고? 웃기고 있네!

인간복제를 놓고 보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한 인간을 복제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약 22억원이라고 한다. 기술의 문제 이전에 부의 문제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과학기술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고 자본에 편입되어 가는데 이런 상황에서 생명공학의 딜레마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불평등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과학은 충분히 이데올로기적이며, 그 과정에서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수단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재고되어야 한다. 생명공학의 논의 속에도 그것은 분명히 드러나서 인간복제에 대한 의견대립을 떠나서 그 의견이 누구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인가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소설 속에서도 경계하는 것은 단순히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비인간적인 세상 뿐만이 아니라, 알파족, 베타족, 오메가족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 새로운 계급사회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과학기술의 발전을 둘러싼 논의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과연 누가 과학기술의 수혜자가 되느냐일 것이다. 그 수혜자가 생명공학기술과 그 기술의 상품화로 돈을 버는 자본이나 자본과 결탁한 국가가 아니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과연 이 논쟁에서 누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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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이야기 그 거세된 꿈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3
최기숙 지음 / 책세상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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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구전설화나 전래동화 속에서 보여지는 어린이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해지는 어린이는 그대로 기호로서의 어린이일 뿐 현실세계의 어린이와는 거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굳이 말하자면 사회적 약자로서의 개념이랄까.

그러나 책에서 보여지듯이 어린이는 때로는 어른이 풀 수 없는 문제를 풀어내는 해결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어른들의 사회에 편승하여 남을 속이고 비리를 저지르는 비겁한 어른들의 신체적 축소판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어린이는 어른과 구분되는 지점에 서있다기보다는 어른과 구별될 수 없는 공통의 장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들과 구별되는 것이 없고 그 상태에서 꿈을 거세당하고 성장할 수 없다면, 어른들은... 기존의 세력은 과연 성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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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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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을 읽으면서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이 책의 모든 부분이 어처구니 없는, 말 그대로의 농담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것'이 농담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의 <농담>들이 즐겁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수동적으로 자본에 끌려가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등장인물들도 전혀 즐겁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꼬집고, 무엇을 비판한 것인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얘기하고 싶었다고? 그렇다면 그것들을 비판하는 것과, 그것들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용인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작가는 그것들이 그렇게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해서 나는 이 소설을 용인할 수 없다. 씁쓸한 현실을 볼 수 있지만, 그 현실을 풀어내는 방법 역시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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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진행형 ing 4 - 완결
강경옥 지음 / 시공사(만화)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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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기댈 사람이 없다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손내밀 사람이 없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먼저 손내밀 수 없다는 것도. 내 스스로도 가끔 내 사람이다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도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난 여기 있고, 너희들은 거기에 있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지만 결국은 힘들어 지는 건 나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움츠러드는 나를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한데...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일거다. 마치 '만나기 위해 만나진 것과 같은'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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