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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사를 믿었다
R. J. 엘로리 지음, 나선숙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책을 만나기란 은근히 까다롭다. 특히나 한가지의 커다란 만족감과는 다르게 여러면에서 고루 만족을 얻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오랜만에 내 맘을 두루두루 흡족하게 해주는 책 한권을 만났다. 『그는 천사를 믿었다』는 추리소설이 갖추고있는 사건을 이끌어나가는 긴박함과 몰입도, 순수문학이나 성장소설 또는 역사소설에서 보여지는 듯, 한 남자의 인생을 통틀어 보여주는 위대함과 깊은 감동, 이 모든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며 읽어내려간 책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소년 조지프 본. 그가 살고있는 마을 오거스타폴스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너무도 어리고 약한 소녀의 죽음. 그러나 살인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연이어 발생하며 가엾은 목숨의 수가 늘어날 수록 잔혹함은 더해만 간다. 조지프는 자신이 소녀들을 지켜주어야 겠다는 사명감 비슷한 책임감을 느끼고 '수호자들'을 결성한다. 과연 이들이 어린 소녀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끔찍한 범인의 탈을 벗겨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을까?
조지프는 천사의 존재를 믿어왔다. 자신의 아버지도 천사가 되었을꺼라 여겼고, 소녀들의 죽음에도 죽음의 천사가 개입했을꺼라 생각했다. 깃털이 날아들면 '그'가 나타나 조지프 자신의 곁을 맴돌며 또 한명의 가엾은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다. 연쇄살인은 점점 범위를 넓혀가며 범인의 뻔뻔스러운 무시무시함을 과시했다. 시체의 잔해들을 아이들이 오가는 곳에 버려두는가 하면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한올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 조지프는 성인이 되어가고 사랑을 시작한다. 그의 곁에 남은 단 한사람인 그녀를 지켜야하는 조지프. 소녀들의 잇단 죽음으로 괴로워하는 조지프에게 위로를 건네주고 그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글쓰기임을 알려주는 그녀. 그녀와의 밝고 평범한 미래를 꿈꾸는 조지프앞에 크나큰 시련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조지프 본. 나는 너를 잘 알아. 네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거 알아. 크루거네 집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 난 네가 그랬을 거라고 말한 적 없다. 그저 너한테 주의를 주는 거야. 사람들이 두려워한다고 말하는거야. p.288]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여러친구들을 만나고 글쓰기에 매달리는 시간들.... 다시 고향인 조지아로 돌아오지만 그를 맞는건 '죽음' 뿐이었다. 영원히 죽음은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숙명처럼 여긴 범인과의 끈질긴 악연, 그가 지켜주고자했던 소녀들의 죽음과 정신이상자 엄마,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감옥생활등. 마흔이 채 되기도 전에 조지프는 이미 한세기를 살아낸듯 굴곡지고 힘겨운 삶을 이겨내고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드디어 범인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내 숨가쁨은 배가되고 놀라움에 잠시 숨을 멈춰야만 했다. 그리고 곧이어 찾아드는 의문, '도대체 그는 왜?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그런짓을 저지른 것일까?' 조지프를 이용하고 마을사람들을 이용하고 뻔뻔함과 잔혹성과 거짓이라는 가면을 드리운채 숨을 쉬고 걸으며 먹고마신 '그'. 그를 처단할 자가 정말 조지프 그 여야만 했을까. 조지프가 좀 더 평범하게 남들처럼 모르는 척, 다 지나간 척 그렇게 살 수는 없었을까. 천사를 믿은 그는 자신이 정의로운 천사가 되어 범인을 추격함으로써 자신의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씻어내고자 용서를 비는 인생을 살아온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조지프라는 한 남자의 인생을 따라가다보니 선과 악에 대한 근보적인 의문부터 시작하여 장르소설이 가지고있는 가벼움과 재미만의 추구를 넘어서 제대로된 글을 통해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어 마음속 깊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좋은책을 만났을 때 느끼는 희열,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