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에 대한 책과 논문이 아내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수록 점점 화가 났다. 냉장고 이론이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죄없는 사람을 모욕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베텔하임과 그의 동료들은 부당하게 엄마들을 비난했다. 온갖 어려움을 딛고 어떻게든 제대로 키워보려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아들에게 매달려 있는 경이로운 모성을 자폐증의 원인이라고 모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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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를 직접 경험한 적이 없는 독자들은 유사점을 들어 자폐 행동을 설명하는 이론이 매우 흥미로웠을 것이다. 몇몇 사람만 아는 심오한 무언가를 비밀스럽게 전수받은 것 같은 만족감도 있었다. 무엇보다 잔혹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을 깨달았다고 느꼈다. 자녀의 자폐증은 엄마의 잘못이다. 이것은 자폐와 강제수용소를 연결시키는 주장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곳에서 성인들의 정신을 완전히 망가뜨린 것이 나치의 소행이라면, 자녀들의 정신을 망가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들이었다. 비유는 완벽했다. 엄마들은 강제수용소의 간수들이었다. 엄마들이 곧 나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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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48초마다 평생 정신연령이 8세 어린이를 넘지 못 할사람이 태어납니다.

두 번째 표지판은 다른 각도에서 본 설명을 덧붙였다.

15초마다 당신이 낸 세금 중 100달러가 정신이상, 정신박약, 범조자 및 기타 결함을 지닌 나쁜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들 돌보는데 들어갑니다.

세 번째 표지판은 희망을 제시했다.

미국에서는 기분 30초마다 혈통이 우수한 사람이 한 명씩 태어납니다.

각 표지판에는 전구가 한 개씩 부착되어 언급된 시간 간격에 따라 깜박거렸다. 48초마다. 15초마다 깜박이는 불빛을 보다가 7분 30초마다 한 번씩 불이 들어오는 전구를 보면 희망의 빛은 아예 켜지지 않을 것 같았다. 좋은 혈통이 점점 드물어진다는 불안감이 절로일었다. 전구들이 전달하는 절박한 메시지를 떠올리며 콘테스트에참가했다가 낙제점을 받은 가족은 기겁할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았다. 미국이란 사회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란 낙인이 찍힌 채 황급히박람회장을 떠났다. 그 또한 나름 유용한 일이었다. 와츠 부인의 희망대로 낙제점을 받은 가족은 사회를 위해 더 이상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혈통이 우수한 가족은 자녀들을 절대로 열등한 가족에게서 태어난 불운한 아이들과 짝짓지 않을 것이었다.
가장 우수한 개체만 추려서 교배하면 가축의 전체적인 품질이 향상된다. 이런 법칙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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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3.23

[두 편의 봄]

1.
봄, 파르티잔 | 서정춘, 캘린더 호수

꽃 그려 새 울려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
// 서정춘의 봄은 꽝꽝 얼은 겨울이다. 싹 틔우기 미안하고, 꽃 피우기 죄스럽고, 열매 맺기가 피 흘리듯 아픈. 민들레 홀씨도 제 발등을 차마 벗어나지 못하는 참혹한 봄. 비쩍 마른 온기와 입을 틀어막은 신음 같은 봄. 살이 베인 듯 아프다.

.
2.
봄의 단장 | 신휘, 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봄에는 울타리를 칠 거야. 너무 높게는 말고 작은 키의 참새들이 단번에 톡톡 뛰어오를 수 있을 만큼의 높이, 이 지구의 중력이 새에게 미칠 원활함의 최대치만큼의 높이로 담장을 두를 거야. 그러면, 그 안에서, 나의 시계가 허용하는 내 눈의 최대한도의 편안함 안에서 새도, 나도 다 같이 마당을 갖게 될 거야.

오는 봄이 걸려 넘어지지 않고, 가는 겨울이 걸려 자빠지지 않도록 이 봄엔 너와 나, 나와 우리 사이에 튀어나온 벽을 허물고 높고 낮은 각의 편견도 없는 울타리를 두를 거야.

예쁜 나비들이 폴폴 날아오를 수 있는 최대한도의 편안함 안에서, 바람이 제 허리를 꺾지 않고도 넘을 수 있는 최소치의 높이 안에서 담장을 칠 거야. 그러면,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넘어다 볼 수 있는 그 담장 안에서, 이 봄엔 너도 나도 다 같이 저마다의 정원을 새로 하나씩 갖게 될 거야.

.
// 신휘의 봄은 아지랑이 간질간질 올라오는 들판이다. 참새가 날개를 접은 채 울타리를 홀짝 뛰어넘고, 몸을 움츠리지 않고 성긴 담장을 드나드는 새와 나비와 바람이 저마다의 정원을 꾸미며 봄을 틔우는 마당.

짧은 시간 나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흙을 고르고 있었다. 봄인 줄 알았다. 읽고 또 읽다가 골짜기로 떠난 파르티잔이 꿈꾸었을 봄이라는 생각에 닿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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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점을 치는 저녁 푸른사상 시선 113
주영국 지음 / 푸른사상 / 201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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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9

// 새점을 치는 저녁 | 주영국

_
1.
그의 시는 깨져 흩어지고 이어 붙인 유리가 아니다. 벽돌이다. 빨간 벽돌이 깨지면 깨진채로 내 자리다! 들어 박힌 단단한 시다.

_
2.
• 어떤 시는 눈물을 짓이긴 충혈된 눈과 같았고

// 체 게바라 생각
삶은 달걀을 먹을 때마다
체 게바라 생각에 목이 멘다
볼리비아의 밀림에서 체가 붙잡힐 때
소총보다 더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는
삶은 달걀 두 개가 든 국방색 반합

밀림에 뜬 애기 달 같은 노른자는
경계를 서던 소년 병사의 팍팍한
꿈을 먹는 것 같아서 더 목이 멘다
혁명도 결국은 살자고 하는 것인데,

삶은 달걀을 먹을 때마다 끝내
반합의 달걀 두 개를 먹지 못하고
예수처럼 정부군에게 죽은 게바라의
살고 싶던 간절한 마음을
먹는 것 같아서 목이 멘다.

_
• 어떤 시는 어처구니없는 삶의 맷돌을
매달고 기어가는 해진 무릎이었고

// 전화위복
입사 25년차 주임이 날아갔다
직급이 바뀐 사원증을 내보이며
술 몇 잔을 내기도 했는데
사직원도 없이 그냥 날아서 갔다
나이 어린 과장 때문이라는 뒷발이 돌았다

날아갔다는 말은 잘렸다는 말보다
덜 속상하고 주체적이기는 해도
결과는 같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날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허무한 위로

퇴직금 축내다
그래도 아이들은 잘 큰다는
물어보지도 않은 대답을 하며
어디 경비 자리라도 알아봐 달라는
날아간 후배의 전화를 받은 밤

나이 어린 과정 덕분에 자리를 보전하며
야근을 하고 있는 30년차
주임의 낡은 의자가 흔들린다.

_
• 어떤 시는 읽다가 웃음이 터졌고

// 검열
어떤 죄를 지어 감옥에 온 남자가 딸이 보내온 편지를 읽고 있다 아빠, 올봄에는 묵은 밭을 일궈 해바라기라도 심을까 해요

남자는 답장을 쓴다 얘야, 그 밭은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 아빠가 거기 뭍어놓은 것이 있단다

딸의 편지를 다시 받은 남자 아빠, 어제는 어떤 아저씨들이 오더니 하루 종일 밭을 파주었어요, 그런데 갈 때는 욕을 하고 갔어요

남자는 이제 답장을 쓴다 얘야, 이제 너의 생각대로 꽃씨를 뿌리렴 아빠가 사람들을 시켜 밭을 일구어주었으니 해바라기들도 잘 자랄 것이다.

_
• 어떤 시는 전직 주정뱅이가
통영 바다에 수장시킨 손수건을 소환했다.

// 낮술
목포 뒷개의 어느 여관에서
새우깡에 마시던 낮술
진경의 화폭에서 새우처럼 잠을 자던
화백이 일어나 술을 따르자
시인이 먼저 간 김현식을 불렀다

2호 광장에서 새벽 2시까지
술을 치던 남자가 압해도로 돌아간 후
그의 애인이 될 뻔했던 여자 하나도
빗속으로 떠나가 버렸다
묽은 티슈는 그녀가 울었다는 흔적이다

술잔을 든 서로의 몸을 찍어주며
절반도 차지 않아 넘치는
싸구려 맥주의 거품처럼 우리는 희망적이었다

밤새 호남선에도 비가 내렸을까,
이난영의 눈물을 몇 번이고 따라 불러도
취하지 않던 목포의 낮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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